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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손수 조립한 4구 라디오로 클래식을 들었을 정도로 공대 체질이었지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다니다다니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졸업을 못 하고못하고, 고시에 실패한 형을 대신하여 집안에서 인정받으려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서 합격하여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하면서 한시와 시조에 능하여 검사 시절에 송도사, 한학도사란 별명으로 불렸다. 육군 법무관으로 있을 때인 1967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귀국하던 수송기에서 [[여수시]] 땅을 바라보며 "눈비벼 다시 보아 민둥산을 알았네/이렇게 헐벗었더냐 꿈에 그린 내조국’,‘옷을 입히리라 초록으로 덮으리라…중략…이 결심 헛되이 마라 천지신명 다 안다’" 라는 한시를 지으며 "벌거숭이 산을 초록으로 덮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하는 송종의는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고 1971년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검사에 있을 때 불하받은 국유지였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땅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다 1998년 3월 [[법제처장]]에서 물러나면서 갖고 있던 법전 등 관계된 책을 불 태우고 [[논산시]]에서 영농조합을 설립해 밤과 딸기를 재배하면서 2015년부터 사재 8억원으로 후배 법조인들을 위한 후원비로 사용하기 위해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천고법치문화재단은 법치주의 확립과 국법질서 수호에 기여한 법조인에게 시상하는 [[천고법치문화상]]을 운영한다.<ref>[http://www.fnnews.com/news/201505211425483249]</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801026006]</ref>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검사들이 더욱 정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4189855]</ref>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검찰동우지에 기고한 ‘오대양 진혼곡’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대양사건이 하필이면 대전지검으로 오게 된 것은,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죽어갔을 30여 명의 원혼들이 한을 풀어달라고 내게 외친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40519/63570519/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