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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해동청의 징발은 더 이상 생여진 부족장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1096년에는 흘석렬부(紇石烈部, {{llang|juc|/xə-ʃĩri-ə fama-a/}})의 아합관과 석로가 오국부로 통하는 응로를 차단하고 거란의 포응사자를 살해하자 거란은 생여진 절도사인 완안부의 [[완얀 잉게|영가]]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거란이 영가를 응로지전이 참여시켜 응로를 원할하게 만들고자 했던 반면 영가는 거란의 위세를 빌어 여진 각 부를 병합하고자 했다. 영가가 병사한 후에 형 핵리발의 동생인 [[완얀 우야수|오아속]]이 절도사직을 계승하면서 여진 부족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고려]]와도 협조하였다.<ref name="Nam">{{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4}}</ref>
 
한편 거란 황제가 매년 가을 사냥을 할 때면 여진 수령은 그곳으로 가서 조견해야 했으나 그것이 너무 고생스러워 불만이 팽배해졌다. 1112년에 [[천조제]]가 [[송화강|혼동강]]에 도착하여 낚시를 했는데 무릇 천리 이내에 있는 여진 추장들은 관례에 따라서 그를 접견해야만 했다. 이때 아골타는 그의 동생인 [[금 태종|오걸매]] 및 점한, 호사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술자리에서 천조제는 여진의 추장들에게 춤을 추도록 하였다으나하였으나 아골타는 이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조제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주변의 만류로 일단 중지하였다. 혼동강의 연회에서 돌아온 아골타는 이후 지금의 [[휘발하]] 유역의 요적의 여진 부락들을 더욱 병탄하였다. 그 부락들의 추장 중에 조삼하골산이 거란으로 도망가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거란 조정에서는 완안부에 사자를 파견해 책임을 물었다. 아울러 몇 차례 아골타에게 입조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매번 병을 핑계로 입조를 회피했다.<ref name="Nam"/>
 
완안부는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졌고 거란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아골타는 흘석렬부의 반인 아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계속 거란의 허실을 탐색하였고, 마침내 1114년 9월에 아골타가 영강주로 진군하였으나 천조제는 경주에서 사냥만 하였다. 단지 해주자사 고선수에게 발해군을 거느리고 대응하여 구원하게 하였다가 대패했다. 영강전투에서 승리하자 아골타는 포로로 잡힌 방어사 대약사노를 비롯한 발해인 장수들을 방면함으로써 발해인을 투항하도록 회유했다. 또한 여진에 투항한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를 고향으로 보내 발해인들을 회유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인데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죄인을 정벌하는 것으로 무고한 사람이게 함부로 미치지는 않는다."라고 선동하게 하는 한편 대장 완안 루실을 요동 남쪽으로 파견해 계요적여진을 회유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