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81번째 줄: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ref>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 [[성운 (1497년)|성운]],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을 내리 세니, 오겸이 크게 놀래며 「한 명단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ref>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퇴계]](退溪)와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退溪)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退溪)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ref>≪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퇴계가 돌아 갈 때 ‘증별시(贈別詩)’를 써 주었는데, "선생은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이백·두보요. 글씨는 왕희지·조맹부로세"라 하였다. 후일 퇴계가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며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나가 동정과 언행을 하나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는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하서' 한 사람일 뿐이었다."라고 하였다.</ref>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휴암 [[백인걸]]·임당 [[정유길]]·금호 임형수·미암 [[유희춘]](柳希春)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를 하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ref>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가마(加麻)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ref>
 
[[1539년]](중종 34)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 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3년]](중종 38) 봄 2월에 스승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를 하고, 이후 기일(忌日)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 관료 생활 ===
줄 94 ⟶ 96:
[[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요직인 [[대간|청요직]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에 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 1월 동궁(東宮)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여름 2월에4월에 스승홍문관 모재박사(慕齋博士)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김안국조선 인종|인종]]이 춘궁(金安國春宮)에서 부음을덕을 듣고기르는데,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겼다.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가마소대(加麻召對)를 하고자주 하였으며, 이후 기일(忌日)에는역시 치제(致齋)를세자의 올렸다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스승을그가 애도하는입직해 있을 '만사(輓詞)'가때에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문집에이슥해서야 전한다파하였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로 승진되었다. 이때에 [[조선 인종|인종]](仁宗)이 춘궁(春宮)에서 덕을 기르는데 [[조선 중종|중종]]이 세자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다하고 자주 불러 강론을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또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墨竹)을 하사하여 뜻을 비치고, 눌러 그에게 명하여 화축(畵軸)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그 시가 아래와 같았다.
114번째 줄:
때는 [[기묘년]] 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바 이는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f>[[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조선)|한충]]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 (1484년)|박훈]]·[[홍언필]]·[[이자 (1480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ref>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종|중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8월 그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양친의연로하신 연로를부모를 들어 돌아가 봉양할 것을 간절히뵙는다고 청원하여 8월에 귀근(歸覲)하였다. 귀근(歸覲)하는 그에게 [[이황|퇴계]]도 시를 지어 송별했다. 겨울 12월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봉양을 이유로 걸양(乞養)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08.20)[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이때 호남관찰사로 와 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4년]](중종 39) 11월 [[조선 중종|중종]]이 승하하고, 그가 가르치던 세자가 [[조선 인종|인종]]으로 등극하여 첫 정사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ㆍ[[김정]]ㆍ[[기준]] 등의 신원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