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히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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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2년([[1597년]]) [[야마시로 국]](山城国) [[후시미 성]](伏見城)의 도쿠가와 저택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정실 [[스겐인|에요]](江与)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모는 교부쿄노 쓰보네(刑部卿局)이다.
 
[[파일:Hideyori Toyotomi.jpg|섬네일|left왼쪽|200px|[[도요토미 히데요리]]]]
[[게이초]] 8년([[1603년]]) [[3월 24일]] 센히메의 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 휘하의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도요토미 가문을 제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에도]]에 바쿠후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센히메는 7세의 나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외아들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인 히데요리(秀頼)와 혼인하여 [[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데요리의 생모는 센히메의 생모 에요의 언니인 [[요도도노]](淀殿; 차차)로, 히데요리와 센히메는 사촌 남매간이기도 하였다. 두 부부 관계는 원만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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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나]] 2년([[1616년]]) 구와나 번(桑名藩)의 번주이자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의 손자인 혼다 다다토키와 재혼하였고 동시에 화장비 명목으로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 때 [[쓰와노 번]](津和野藩)의 번주인 [[사카자키 나오모리]](坂崎直盛)가 구와나 번으로 향하는 센히메의 혼례 행렬을 덮쳐 센히메의 가마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당하여 사카자키 나오모리는 [[할복]]하고 [[사카자키씨]]는 [[개역]](改易) 처분을 당하는 센히메 사건(千姫事件)이 발생하였다. 이후 쓰와노 번은 [[시카노 번]]주였던 [[가메이 마사노리]]가 수여받게 된다.
 
[[파일:Himeji Castle The Keep Towers.jpg|섬네일|right오른쪽|200px|히메지 성]]
[[겐나]] 3년([[1617년]]) 혼다 가문이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로 영지가 변경되면서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함께 [[8월 28일]] [[히메지 성]](姫路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인 겐나 4년([[1618년]])에는 장녀 가쓰히메(勝姫), 겐나 5년([[1619년]]) 장남 고치요(幸千代)가 태어나는 등 혼다 다다토키와 센히메는 금슬도 좋았지만, 겐나 7년([[1621년]]) 아들 고치요가 세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간에이]] 3년([[1626년]]) 남편 혼다 다다토키와 어머니 에요가 연이어 사망하자 딸 가쓰히메와 함께 혼다 가문을 나와 친정 [[에도 성]](江戸城)으로 되돌아왔다. 불교에 입문하여 덴주인이라는 법명을 받은 센히메는 가쓰히메와 함께 에도의 다케바시 저택에서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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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도쿠가와씨]]
[[분류:도요토미씨]]
[[분류:구와나 번구와나번 사람]]
[[분류:히메지 번 사람]]
[[분류:17세기 일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