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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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한국사}}
=== 삼국 시대의 배경과 원삼국 시대 ===
=== 삼국 시대의 배경과 원삼국 시[[기원전 108년|기원전]] [[기원전 108년|108왕검성]]3ㅣ(王儉城)을 함락시키고 [[기원전 108년|년고조선]]을 멸망시킨 [[왕검성|왕검한나라]]는 옛 고조선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고조선|고한사군]]([[고조선|조낙랑군]], [[한나라|라임둔군]], [[한사군|한사진번군]](, [[낙랑군|낙랑현도군]])의 지배 시기에 [[고조선]] 사회의 기존 상급 통합조직은 해체되었다. [[중국인|중국중국계 주민들]]은 군현 내의 주요 지점에 설치된 토성에 주로 거주하면서 지배 족속으로 군림하였고, 고조선인은 촌락 단위로 군현 조직에 예속되었다. 또한 [[8조법|8조]]의 었법금이법금이 갑자기 60여 조로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조선]]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문화에 혼란이 일어났다. 경제적으로도 군현의 공적인 수취 외에 [[한나라]]인들에 의한 수탈적인 상거래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강요한 한군현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곧이어 일어났고, 그 결과 2개 군이 폐지되고 1개 군이 축소되는 변동이 잇따랐다. ===
 
그러나 [[고조선]] 사회의 중심부였던 [[한반도]] 서북 지방에 설치된 낙랑군은 점차 지배 영역이 축소되긴 했지만 기원후 4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다. 3세기 초에는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대방군]]이 설치되었다. [[낙랑군]] 관할에 있었던 조선현(朝鮮縣), 즉 [[평양직할시|평양]] 지역은 비단 [[관서 지방|한반도 서북부]]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지역의 주민과 [[한나라|중국]] 사이의 무역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이 지역에는 상당수의 [[중국인|중국계]] 주민이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