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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 연구와 학맥 ====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으며, [[기묘사화|기묘 사림]]들인 조원기·[[기준]]·[[송순]]·[[박상]]등의 아낌을 받고, 성리학에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는데 그들은 [[1519년]] 11월 [[기묘년]]에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같이 배웠는바, 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직계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따라서 [[조광조]]와는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의[[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로 후대 사림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김정 (조선)|김정]]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문신으로서 처음으로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조선 중종|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개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신원 복원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