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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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베토벤의 이런 사고방식은 후대 음악가 및 예술가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데 크게 기여를 하여 베토벤 사후에 여러 음악가들이 귀족의 종속관계가 아닌 음악가, 즉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길을 가는 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어 후대 음악가들이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베토벤의 후원으로 돌아와서, 그의 데뷔 초창기에는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면서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왕실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카펠마이스터|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나폴레옹 전쟁|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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