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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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2세'''({{llang|la|Innocentius PP. II}}, {{llang|it|Papa Innocenzo II}})는 제164대 [[교황]](재위: [[1130년]] [[2월 14일]] ~ [[1143년]] [[9월 24일]])이다. 본명은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llang|it|Gregorio Papareschi}})이다. 그의 선출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재임 첫 8년은
== 생애 초기 ==
파파레스키는 트라스테베레 구역의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그는 [[
[[교황 파스칼 2세]]는 그를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교황 젤라시오 2세]]와 동행하여 프랑스로 건너갔다.<ref>''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vol. 5, ''s.v.'' "Onnocent II" ([http://www.ccel.org/ccel/schaff/encyc05/Page_497.html on-line text]).</ref> 그는 [[교황 갈리스토 2세]]로부터 각종 요직을 두루 거치며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보름스 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름스]]로 교황 사절로 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112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의 평화 협정을, 1123년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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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한 순간 추기경단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분열을 막기 위하여 추기경들은 교황청 상서국장 아이메릭에 의해 구성된 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에게 교황 선거를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노년층이 추기경단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젊은 층은 위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 내적 쇄신을 추구하던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 추기경이 다섯 표를 얻고 서둘러 선출되어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되었다.<ref>The ''Historia Compostelana'', composed in Galicia (Spain) for the bishop of Santiago de Compostela, provides information on the details of the disputed election of 1130.</ref> 그는 호노리오 2세의 선종 후 다음날인 2월 14일에 교황으로 정식 등극하였고 젊은 추기경들이 환호로써 맞이하였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많은데다가 변혁을 두려워하던 노년층은 이에 불응하여, 아이메릭의 반대자였던 가문인 프란지파니 출신의 피에트로 피에르레오니 추기경을 선출하였다. 피에르레오니는 스스로 [[
==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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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
1139년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또한 1139년 《모든 완벽한 선물》(Omne Datum Optimum)에서 인노첸시오 2세는 오직 교황만이 21세 이하의 종교적 군사적 조직인 [[성전 기사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성전 기사단의 권력과 부를 쌓는데 핵심이 되었으며, 역설적이게도 1307년 10월 그들이 진압당하는 사건을 초래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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