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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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소 1세는 305년경<ref>《The Liturgy of the Hours》, Vol. I, 11 December.</ref> 오늘날 [[포르투갈]] [[이다냐아벨냐]]에 해당하는 [[서로마 제국]]의 속령인 [[루시타니아]]의 [[에기타니아]]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극과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의 통일 및 재분열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인정된 것([[밀라노 칙령]])과 380년 공식 국교([[로마 제국의 국가교회]])로 지정된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다마소 1세는 로마의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에서 성직자로 사목하였으며, 교황 리베리오가 선종함에 따라 공석이 된 로마 주교좌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여러 세력 간의 폭력이 난무하는 와중에 로마 주교좌를 계승하였다. 이 와중에 다마소의 지지자들이 적대자이자 리베리오 교황의 [[부제 (기독교)|부제]]였던 [[대립 교황대립교황 우르시노|우르시노]]의 지지자들을 공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진압으로 가까스로 상황이 수습될 수 있었다.
 
다마소 1세는 로마 주교좌에 착좌하자마자 살인과 (혼인하지 않았음에도<ref>M. Walsh, ''Butler's Lives of the Saints'' (HarperCollins Publishers: New York, 1991), 413.</ref>) 간통 등의 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다마소 1세와 첨예한 갈등으로 인해 교회 분열을 야기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퍼뜨린 이야기라서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그의 개인적인 문제들과는 별개로 종교적으로는 많은 업적을 쌓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성당의 복구와 자신의 비서인 [[예로니모]]를 시켜 [[성경]] 전서의 [[라틴어]] 번역을 하게 한 것([[불가타 성경]]) 및 성경의 정전(正典) 목록 형성에 기여한 것, 382년 [[로마 교회회의]]를 주재한 것, 또한, 그는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심을 장려하기도 하였다.<ref>M. Walsh, ''Butler's Lives'', 4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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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시절에 새 로마 주교는 로마 관구에 속한 다른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로마 교구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의해 특정인을 투표로 선출하거나 지명하는 방식으로 착좌하였다. 이는 당시 다른 [[교구]]들에서도 자신들의 새 주교를 뽑을 때 관례적으로 사용한 방식이었다.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던 교회가 박해 시대에서 살아남는데는 이러한 단순한 방법이 잘 통하였지만, 점차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새 로마 주교를 뽑는 거수 투표 방식은 경쟁상대 간의 극한 대립을 초래하여 파벌이 생기는 사태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다른 주교 선거에도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4세기에는 새로 선출된 로마 주교들이 자신의 주교 착좌 승인을 받기 위해 로마 황제들에게 찾아갔는데, 이는 이따금씩 교회 안 문제를 국가가 간섭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366년 9월 24일 [[교황 리베리오|리베리오]]가 선종하자 로마 교회는 두 파벌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리베리오의 [[부제 (기독교)|부제]]로 봉사하였던 우르시노를 추종하는 세력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한때 [[대립 교황대립교황 펠릭스 2세]]에게 충성하였던 다마소를 추종하는 세력이었다. 대립 교황대립교황 펠릭스 2세를 따랐던 귀족층은 다마소를 지지한 반면, 리베리오를 따랐던 부제들과 평신도들은 우르시노를 지지하였다. 당장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다마소와 우르시노 두 사람은 각각 양 진영에서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다마소는 [[산 로렌초 인 루치나 성당]]에서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그해 10월에 충돌하게 되었다. 양 진영은 로마 교외에서 충돌하여 결국 시신니오 성당(훗날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137명이 대량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폭력적인 유혈 사태가 발발하자 로마 시 장관들이 개입하여 가까스로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장관들은 우르시노를 [[골]] 지역으로 추방하였다.<ref>[[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27.3.12; 27.9.9. J.C. Rolfe 번역, ''Ammianus Marcellinus'' (Cambridge: Loeb Classical Library, 1939), pp. 19, 61ff</ref> 그러나 우르시노가 추방된 후에도 양측 지지자들 간의 충돌은 끊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화되었다.
 
[[예로니모]]와 [[티라니우스 루피누스]]와 같은 교회 역사학자들은 다마소 1세의 편에 섰다. 378년에 열린 시노드에서는 우르시노를 단죄하고 다마소 1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인정하였다. [[암브로시오]]가 전한 바에 의하면, 우르시노와 그 일당은 이후 [[아리우스파]]와 결속하여 다마소 1세를 괴롭혔다고 한다.<ref>Ambrose, ''Epistles'' iv</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