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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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표}}
 
'''일제강점기'''([[일본어]]:大日本帝国領朝鮮),([[영어]]: Korea under Japanese rule)[[1910년|(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일제의 식민지로서 일본령 조선이 존재했던 기간을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약 35년 간 이어진 주요 시대 중 하나이다. 1910년 [[한일병합]]{{#tag:ref|[[대한민국]]에서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group="주"}} 이후 [[조선 총독|총독]]이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 왕]]의 명을 받아 통치하는 형식으로 식민지배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적 및 외교적으로 전적인 권한은 일본 제국에 있었다.(죽일 놈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흔히 통치 정책의 방향을 기준으로 '헌병민족 경찰학살 통치기'(1910년~1919년), '문화개같은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일본]]과 단교하고 양국관계는 끊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여 [[9월 2일]] [[미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후 행정권 인수 인계 기간을 거치며 [[9월 28일]]까지 유지되었다.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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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 통치기 (1910 ~ 1919) ===
==== 한일 강제 병합 초반 ====
[[파일:Masatake Terauchi uniform.jpg|150px|왼쪽|섬네일|무단 통치를 실시한 초대 조선 총독ㄸㅎㅇ통 [[데라우치 마사타케개갞기]].]]
강제 병합 직후 [[조선총독부개같은총독부]]는 1910년 9월에 헌병 경찰을 창설하고 [[무단 통치]]에 돌입하게 된다. 즉 헌병이 일반 경찰의 행정까지 담당하면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즉결 처분권 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조선총독은개똥총독은 일본군 현역 혹은 일본 예비역 장성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대 통솔권까지 장악하였다. 또한 천황의 직속이라 내각이나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총독의똥독의 아래에는 행정과 교육, 문화를 담당하는 [[정무총감정무똥감]]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총감경무똥감]]이 존재하였다. [[조선총독부조선똥독부]]는 2만여 명의 헌병 경찰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하고 [[한국인]] 중 헌병 보조원을 채용하여 헌병들의 업무를 보조케 하여 헌병 중심의 억압 통치를 실시하였다.
 
헌병 경찰은 치안업무와 함께,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관여하였는데, 여기에 당시 통치의 억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가 [[조선 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태형]]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국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일제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을 통해 한국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결론 당시의 일본은 븅...)
 
일본은 [[제1차 조선 교육령]]에서 한문 교육 중심의 [[서당]]을 폐지하고 [[일본 초등학교]]를 설립해 갔다. 기존의 학교는 [[구제전문학교]]으로 재편되었다.
 
==== 토지, 산림 수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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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통치기 (1919 ~ 1931) ===
[[파일:Makoto Saito 2.jpg|150px|왼쪽|섬네일|문화 통치를 실시한 조선총독 [[사이토사이코 마코토]].]]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사이코 마코토]] 총독의똥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기 시작하였고,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민간의 고등교육을 부정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대우하는 각종 악법들은 잔존하였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인용문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