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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12월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 [[조선 중종|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않고 [[조선 인종|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 (1499년)|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 (1499년)|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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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정철]](鄭澈)·오건(吳健)ㆍ양자징(梁子徵) 등이 있다
 
시문에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지많이 않다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장성군|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