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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갈의 7부의 위치 ==
▲=== [[속말말갈|속말부]](粟末部) ===
《수서》에는 속말부가 "[[고구려]]와 인접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속말말갈은 [[흑수말갈]]과 함께 말갈 7부 가운데 위치 비정상 논란이 가장 적은 집단이다.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은 모두 거주지 인근의 강 이름에 따라 부명(部名)이 일컬어졌다. 즉 속말말갈은 속말수, 지금의 [[송화강]]가에 사는 말갈이라고 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ref name="SUK">{{서적 인용|author=김현숙|authorlink=|title=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series=|publisher=모시는사람들|year=2005|isbn=9788990699305|page=438~47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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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말말갈 유적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양둔 대해맹을 비롯한 속말말갈 유적에서도 농기구류보다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예를 들어 도, 검, 비수, 창, 화살과 갑옷, 마구 등이 나와 이미 비교적 완벽하게 무기 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공구는 도끼·자귀·낫 등이 있었지만 그 양이 무기류에 비해 적었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세력 집단이었다는 것이 유물을 통해서 입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ref name="SUK"/>
▲=== 백돌부(伯咄部) ===
백돌부는 속말부 북쪽에 있으며 정병(精兵)이 7천이라고 한다. 백돌말갈에 대해서는 명칭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백도눌]] 지방으로 보는 설이 가장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수]]도 백돌말갈의 거주지에 포함된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늘어났다. 특히 이곳에 있는 노하심 유적을 백돌말갈의 유적지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 연구 성과도 제출됐다.<ref name="SUK"/> 반면 부여(백도눌)와 납림하 유역 쌍성(雙城)을 포함한 주변 일대가 백돌말갈의 근거지였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아직까지 말갈 관련 유적 보고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ref name="SUK"/>
=== 안차골부 ===
안차골부는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아센허]](阿什河)를 [[만주어]]로 알추카(阿勒楚客, {{llang|mnc|{{만몽 유니코드|ᠠᠯᠴᡠᡴ᠋ᠠ}}|}})라 했고, 금대 [[여진어]]로는 안춘(按出虎, {{llang|juc|Antʃu-un}})라고 했다.<ref group="주">'금'을 의미한다.</ref> 이와 안차골과 발음이 흡사하다고 추정하는 점에서 안차골을 아십하 유역에 있던 말갈이라 보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십하 하류의 황가외자(黃家崴子), 황산(黃山) 남북산성자, 묵리가(墨里家)와 고태자(高台子) 등지에서 발견된 문물들이 곧 안차골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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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차골부는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아센허]](阿什河)를 [[만주어]]로 알추카(阿勒楚客, {{llang|mnc|{{만몽 유니코드|ᠠᠯᠴᡠᡴ᠋ᠠ}}|}})라 했고, 금대 [[여진어]]로는 안춘(按出虎, {{llang|juc|Antʃu-un}})라고 했다.<ref group="주">'금'을 의미한다.</ref> 이와 안차골과 발음이 흡사하다고 추정하는 점에서 안차골을 아십하 유역에 있던 말갈이라 보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아십하 하류의 황가외자(黃家崴子), 황산(黃山) 남북산성자, 묵리가(墨里家)와 고태자(高台子) 등지에서 발견된 문물들이 곧 안차골부의 문화 유존이라고 보고 있다.<ref name="SUK"/>
▲불녈부는 위치비정상 차이가 많은 부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도 [[흥개호]] 일대로 보는 설과 [[목단강]] 유역의 영안 지역으로 보는 설이 가장 많다. 영안에서는 말갈로부터 [[발해]] 시기로 이어지는 고분군이 대규모 발견되었는데, 다른 말갈 고분과 성격 차가 현저해서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영안시 발해진(渤海鎭)의 서석강고분군(西石崗古墳群), 즉 홍준어장고분군(虹鱒魚場古墳群)이 그것이다.<ref name="SUK"/>
서석강-홍준어장 유적에서도 역시 말갈관(靺鞨罐)으로 불리는 중순심복관(重脣深腹罐)을 비롯한 말갈도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 도기는 속말말갈인 양둔 대해맹 3기층에서 나온 도기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도 말갈 7부 가운데 한 부로 볼 수 있는데, 사료에 나오는 위치 설명으로 보아 이 유적은 불녈말갈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ef name="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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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준어장 고분군을 토착말갈이나 말갈 평민들이 조성했다는 견해들 자체가 모두 홍준어장고분군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통해 얻어진 결론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반론이 있다.<ref>{{저널 인용|저자=김진광|제목=홍준어장고분군의 사회적 지위 및 성격-고분의 유형과 분포상황을 중심으로-|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0902&sereArticleSearchBean.sereId=001250&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52236|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고구려발해연구|권=42|날짜=2012년 3월|쪽=3}}</ref>
=== 호실부
호실부의 위치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나누어져 있다. 사료에는 "
호실은 [[옥저]]와 동음이라고 하면서 이 일대를 [[동옥저]]의 분포 지역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옥저의 범위는 수분하 유역까지 미치지 않았다. 옥저는 [[남옥저]], [[북옥저]] 모두 4세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서 지방관을 파견해 직접 통치를 시행했던 지역이다. 4세기 중반경에 조성된 [[연변]] 지역의 고구려 장성도 그것을 입증한다.<ref name="SUK"/>
=== 흑수부
{{본문|흑수말갈}}
[[흑수말갈]]의 거주지는 [[흑룡강]] 주변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흑수말갈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흑룡강 중하류 지역에 있는 나이펠트(乃伊費尒德) 고분군, 수빈(綏繽) 동인유적(同仁遺蹟), 몽북(夢北) 단결묘장(団結墓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나이펠트 고분군은 1960년부터 1961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토광수혈봉토묘가 모두 40기였다. 이 유적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ref name="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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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수말갈로 소급되는 나이펠트 그룹은 7세기 말에는 제야–부레야 저지대에 출연했던 흔적이 발견된다.<ref>{{저널 인용|저자=홍형우|제목=서(西) 아무르 지역 말갈(靺鞨) 토기의 특성과 그 전개 : -최근 발굴 유적을 중심으로|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0804&sereArticleSearchBean.sereId=000730&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04491|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한국상고사학보|권=74|날짜=2011년 11월}}</ref>
{{본문|백산말갈}}
▲=== 백산부(白山部) ===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백두산]] 주변과 [[연변]] 지역 일대로 보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최근 [[함경도]] 쪽으로 내려 보거나 연변 지역과 한반도 동북부 지역을 모두 포괄한 것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병이 수천, 또는 7천이라고 나오는 속말말갈, 백돌말갈과 달리 백산말갈은 3천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거주지가 다른 말갈 집단보다 넓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돈화와 백두산 일대 지역이 백산말갈의 중심지였고, 그 외 연길·용정·훈춘과 경성 주변 일대를 포함한 지역으로 한정될 것으로 본다.<ref name="KIM">{{서적 인용|author=김현숙|authorlink=|title=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series=|publisher=모시는사람들|year=2005|isbn=9788990699305|page=438~479}}</ref>
《[[구당서]]》에 "백산부는 본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평양]]이 수복된 후에 부중(部衆)이 많이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구절이 나오듯이, 백산말갈은 고구려 지배 아래 일찍부터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그 지배 아래 있었다. 따라서 백산말갈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고구려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발해 건국지가 돈화였던 것도 무관하지
그러나 백산말갈의 동쪽으로 비정되는 어떠한 말갈 세력도 없음을 감안하여 연해주 남부 일대까지를 고고학적으로 백산말갈의 맥락에서 이해해도 큰 지장은 없기 때문에, 고구려의 책성 치소로 꼽히는 연변과 함께 연해주 일대도 백산말갈의 거주지로 꼽힌다. 그런데 연변지역의 말갈에 대해서는 극히 적은 연구가 있을 뿐 그들의 고고학적 실체는 그리 뚜렷하지 않다. 말갈에 대한 지리적 비정을 한 20여 명의 관련 연구자들은 연변 일대를 중심으로 연변일대와 돈화, 백두산 일대로 본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46~4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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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기록을 참고하면 [[관구검]]의 침략으로 연변~연해주 일대의 토착 [[옥저]] 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고,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3~4세기 이 지역 유적이 공백이기라는 점으로도 반증된다. 그런데 편년 논란이 다소 있지만 4세기부터는 말갈 유적이 등장한다. 이들 초기 말갈 유적은 폴체문화의 늦은 단계와 매우 유사한데, 이는 말갈문화가 폴체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한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55}}</ref> 백산말갈의 문화를 형성 주민들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ref group="주">''范恩實(2003), 「靺鞨族屬及渤海建國前的靺鞨與周邊關係」, 『盛唐時代與東北亞政局』(王小甫, 主編), 北京大學盛唐硏究叢書, 上海辭書出版社.'' 범은실은 고구려와 흑수부는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342년 고구려가 모용씨의 공격을 받으면서 북옥저 지구에 대한 세력이 약화되자 이 지역을 흑수부가 장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무구검의 고구려 침범으로 옥저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숙신계가 이곳으로 진출하여 원래 이주해 있던 숙신 부락과 융합하여 백산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또 이들이 고구려에 신속하게 된 것은 영락 8년(399년) 식신토곡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기 때문이며, 이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함께 중원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백산부를 점거한 후에도 고구려가 그 지역으로 완전히 진입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백산부 지역에 고구려의 유적유물이 매우 적고, 일부 지역에 집중된 고구려성도 신라, 백제에 대한 방어용일 뿐이고, 군사활동 양상에서 말갈이 매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f> 말갈문화는 [[읍루]](폴체문화)와 강한 친연성을 보여주는데, 이미 폴체문화는 연해주 지역으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남하해서 토착화(올가문화)가 된 상태이다. 원래 연해주 일대에서 옥저계 문화로 간주되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1세기 이후에는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따라서 관구검이 침략했을 당시에 옥저계 문화라고 하는 집단들은 폴체계 문화를 위주로 하고 옥저계통의 문화가 일부 섞여있는 정도의 물질문화상이었을 것이다.<ref>{{저널 인용|저자=강인욱|제목=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8|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55~56}}</ref>
7세기 중반 이타인은 책성도독겸양병마(柵城都督兼揔兵馬)의 관직을 맡아 고구려의 12주와 함께 말갈의 37부를 총괄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책성이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주(州)와 같은 일반행정단위와 함께 말갈 제부를 관할했음을 말해준다.<ref name="LEE">{{저널 인용|저자=이정빈|제목=6세기 중·후반 요서말갈(遼西靺鞨)과 돌궐·고구려|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88952|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61|날짜=2018년|쪽=32~33}}</ref>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는 제성(諸城)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제성은 규모와 기능에 따라 대성(大城)·성(城)·소성(小城) 등으로 구분되었고, 그마다 각급의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다.<ref>{{저널 인용|저자=임기환|제목=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柵城과 新城을 중심으로-|url=https://www.kci.go.kr/kciportal/mSearch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insiId=INS000002388&sereArticleSearchBean.sereId=002002&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27601|날짜확인=2019년 6월 6일|총서=동북아역사논총|호=38|날짜=2012년|쪽=92~94}}</ref> 책성은 이 중에서 대성에 해당하였다.<ref name="LEE"/>
돈화·용정·화룡 등에서 발해 시기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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