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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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시위 정보
{{다른 뜻 넘어옴|세종}}
|명칭 = 3·1 운동
{{왕족 정보
|전체 = [[한국의 독립운동]]
|이름 = 김세정
|그림 = March 1st movement.jpg
|원래 이름 = 世宗
|그림설명 = 서울 [[탑골 공원]]의 3·1 운동 서판
|그림 = Statue of King Sejong - SK.jpg
|날짜 = [[1919년]] [[3월 1일]]- 1919년 [[4월 11일]]
|그림설명 =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지역 = {{국기그림|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
|작위 =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
|목적 = 조선의 독립
|재위 = 1418년 9월 9일-1450년 4월 8일
|즉위식종류 =
|원인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br/ >
|전임자 = [[조선 태종|태종]]
[[한국의 민족주의]] <br/ >
|후임자 = [[조선 문종|문종]]
[[2·8 독립 선언]] <br/>
|재상 = '''[[의정부]](議政府)'''
[[파리 강화 회의]] <br/ >
[[심온]](沈溫)
[[고종 독살설]]
[[류정현]](柳廷顯)
|결과 = 일제의 무력진압
[[이직]](李稷)
* 일제의 [[문화 통치]] 시작
'''[[황희]](黃喜)'''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하연]](河演)'''
* 국외 무장 독립 투쟁 촉진
|섭정 = [[조선 태종|상왕 태종 이방원]] (1418년~1422년) <br/> [[류정현|영의정 류정현]] (1422년) <br/> [[조선 문종|왕세자 이향]] (1442년~1450년)
* [[5·4 운동]]을 비롯한 세계 독립 운동에 영향
|휘 = 이도(李祹)
|시위대1 = [[한국인]]
|별호 = 초명은 막동(莫同), 자는 원정(元正)
|시위대2 = [[일본 제국]]
|연호 =
|인원1 = 2,020,000명 이상
|묘호 = 세종(世宗)
|인원2 = 불명
|존호 =
|주요인물1 = [[한국인|민중 주도]]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주요인물2 = [[데라우치 마사타케]]
|능호 = [[영녕릉|영릉]]
|사망자 = 7,000명 이상
|출생일 = {{출생일|1397|5|15}}
|부상자 = 45,000명 이상
|출생지 = [[조선]] [[한성부]] [[통인동|준수방]]<br/>(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체포자 = 49,000명 이상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450|4|8|1397|5|15}}
|구금자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동별궁
|형사처벌자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벌금형자 =
|능묘 =
|사상자_제목 =
|왕조 = {{국기나라|조선}}
|기타 =
|가문 = [[전주 이씨]]
|아버지 = [[조선 태종|태종]]
|어머니 = [[원경왕후]]
|배우자 = [[소헌왕후]]
|자녀 = 적자녀 10명:<br />[[정소공주]] ([[1412년]] 출생),<br />'''[[조선 문종|<span style="visibility:hidden">문</span>문종<span style="visibility:hidden">종</span>]]''' ([[1414년]] 출생),<br />[[정의공주]] ([[1415년]] 출생),<br />'''[[조선 세조|<span style="visibility:hidden">세</span>세조<span style="visibility:hidden">조</span>]]''' ([[1417년]] 출생),<br />[[안평대군]] ([[1418년]] 출생),<br />[[임영대군]] ([[1419년]] 출생),<br />[[광평대군]] ([[1425년]] 출생),<br />[[금성대군]] ([[1426년]] 출생),<br />[[평원대군]] ([[1427년]] 출생), <br /> [[영응대군]] ([[1434년]] 출생)
|친인척 = [[민제 (조선)|민제]](외조부) <br /> [[심온]](장인) <br /> [[경신공주]](고모) <br /> [[이애 (1363년)|이애]](고모부) <br /> [[경선공주]](고모) <br /> [[심종]](고모부) <br /> [[노한]](이모부) <br /> [[민무구]](외숙부) <br /> [[민무질]](외숙부) <br /> [[민무휼]](외숙부) <br /> [[민무회]](외숙부) <br /> 심준(처남) <br /> [[심회]](처남) <br /> [[심결]](처남) <br /> 안맹담(사위) <br /> [[심안의]](사위) <br /> [[윤사로]](사위)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대승불교]])
}}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ref>세종대왕 탄생일은 [[1397년]] [[음력 4월 10일]]이다. 이를 [[태양력|양력]]으로 환산할 때, [[1397년]] 당시 서양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5월 7일]]이 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5월 15일]]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http://astro.kasi.re.kr/Life/ConvertSolarLunarForm.aspx?MenuID=115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사이트] {{웨이백|url=http://astro.kasi.re.kr/Life/ConvertSolarLunarForm.aspx?MenuID=115 |date=20130805215029 }} 혹은 [http://astro.kasi.re.kr/Community/QuestionViewForm.aspx?MenuID=1593&QuestionID=22978 천문참여관 질문상자] {{웨이백|url=http://astro.kasi.re.kr/Community/QuestionViewForm.aspx?MenuID=1593&QuestionID=22978 |date=20140225040727 }} 를 참조하라.)</ref>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씨|성]]은 [[이씨|이]](李), [[이름|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다. '''세종'''은 [[묘호]]이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고,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존시를 합치면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 된다. [[조선 태종|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며,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훙서한 최초의 왕이다.<ref name="aks">[[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97_1_0005792 "세종 (世宗)"]</ref><ref name="encyber">[[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 백과사전]] [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93122&contentno=93122 "세종 世宗"]{{깨진 링크|url=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93122&contentno=93122 }}</ref> [[한성부|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아버지 [[조선 태종|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대군|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1383년)|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의원 내각제|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은 과학, 예술, 문화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퍼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ref>고려 [[대제학]]을 역임한 백인관(白仁寬, 1341~1421)은 세종시대 정자 '선정' 지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7750&isPc=true 임금의 부름 세 번이나 거부한 사람 오마이뉴스 2016년6월20일자]</ref>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경도|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당뇨]], [[성병]](이 시대에는 [[생식기]]와 관련된 [[질병|병]]이면 [[성병]]이라고 불렀다.) 등을 이기지 못하고 [[1450년]]에 [[죽음|승하]]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뉴라이트 신복룡 교수나 일본의 야마기 겐타로는 약 50만 명 정도가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ref name="shin216"/><ref name="yamabegen"/>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 진행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