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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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3·1 운동
▲{{왕족 정보
|전체 = [[한국의 독립운동]]
|그림 = March 1st movement.jpg
|그림설명 = 서울 [[탑골 공원]]의 3·1 운동 서판
|날짜 = [[1919년]] [[3월 1일]]- 1919년 [[4월 11일]]
|지역 = {{국기그림|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
|목적 = 조선의 독립
|
|원인 =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br/ >
[[한국의 민족주의]] <br/ >
[[2·8 독립 선언]] <br/>
[[파리 강화 회의]] <br/ >
[[고종 독살설]]
|결과 = 일제의 무력진압
* 일제의 [[문화 통치]] 시작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국외 무장 독립 투쟁 촉진
* [[5·4 운동]]을 비롯한 세계 독립 운동에 영향
|시위대1 = [[한국인]]
|시위대2 = [[일본 제국]]
|인원1 = 2,020,000명 이상
|인원2 = 불명
|주요인물1 = [[한국인|민중 주도]]
|주요인물2 =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망자 = 7,000명 이상
|부상자 = 45,000명 이상
|체포자 = 49,000명 이상
|구금자 =
|형사처벌자 =
|벌금형자 =
|사상자_제목 =
|기타 =
}}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본 제국|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한편 뉴라이트 신복룡 교수나 일본의 야마기 겐타로는 약 50만 명 정도가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ref name="shin216"/><ref name="yamabegen"/>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 진행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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