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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소외 한민족 (현재 남한인) 이라 일컫는 반도 남부의 원주민들의 국가라기 보단 중원과 낙랑에서 이주해온 한족, 만주에서 내려온 말갈 수렵민족들의 혼합 국가로 평가된다. 문화적으로도 한족의 문화 문물을 대거 수용하여 발전 하였으며 낙랑과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건국되고 삼족오등의 문양을 사용 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말갈과 거란족 용병이 절반을 넘었으며 이런 이민족들에게 토지와 물자를 제공해주지 못했을 경우 되려 침략을 당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실상 반도 원주민들의 영토는 만주와 요동이 아닌 반도 내로 국한되어 있었으며 후에 세워진 발해의 경우는 아예 말갈족이 반도 원주민을 지배하는 국가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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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와 극복 ===
{{참고|고구려-위 전쟁}}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고구려와 [[위 (삼국)|위]](魏)나라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위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 공격했다. 하지만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246년]] 고구려는 환도성(丸都城)에서 농성하며 싸웠으나 동천왕은 옥저로 피란을 가고 말았다.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위군은 물러났고 환도성 대신 서쪽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ref name=AA>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깨진 링크|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05046 }}</ref>
 
큰 위기를 겪었던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정복하는 활동을 재개하였다. [[미천왕]](美川王)은 폭군 [[봉상왕]]을 [[창조리]]와 함께 내쫓고,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낙랑을 함락시키고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313년]] 낙랑군(樂浪郡), [[314년]]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정복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고국원왕]](故國原王)대인 [[339년]]부터 [[343년]]까지 [[선비족]] [[모용씨]]가 중국인들을 정복하고 세운 [[전연]](前燕)의 [[모용황]]과 전쟁을 하였고 공격을 받았으나 고구려 군은 [[전연]](前燕)을 침공하여 유주 지역(베이징과 톈진지역)을 정복했다. 고구려의 덕흥리 무덤에 성씨가 복성인 고구려인 제후왕에 유주시자라는 표문이 있어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고국원왕때부터 요동과 유주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는 한동안 눈을 남쪽으로 돌려 369년 백제의 치양성(雉壤城: 지금의 [[황해도]] [[배천군]])을 공격하여 백제를 도발하였다. 그러자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역공을 받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 (십육국)|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았다. 또한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 광개토대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