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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 ===
[[파일:Rubbing of the Gwanggaeto Stele.jpg|170px|섬네일|왼쪽|광개토대왕릉 비문 탁본]]
 
소수림왕의 중흥을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에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남쪽으로 백제를 먼저 공략하였다. [[392년]] 백제를 수차례 공격하여 백제를 약화하게 했으며, [[396년]] 한성을 대대적으로 포위하였다. [[백제 아신왕|아신왕]]은 다급히 항복하였고, 고구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동맹국 [[신라]]가 백제의 후원을 받는 [[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400년]] 그들을 격파하고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가야]]군을 격파하였다. 하지만 남쪽의 병력이 집중되어서 후연에게 고구려 북쪽 500리 땅을 일거에 잃었다.
 
남쪽을 공략한 광개토대왕은 [[402년]]부터 중국의 후연과의 본격적인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에 정복된 거란족을 이용하여 중국 후연을 공격하고 중국 후연의 성들을 차례 차례 공략하면서 후연은 고구려의 매서운 공격에 점점 쇠약해진다. 중국 후연(後燕)은 고구려의 유민을 천왕(天王:중국 북조의 황제의 호칭)으로 세우고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고구려의 속국이 된 [[북연]]과 친선 관계를 맺어 서쪽을 안정케 했다. 북쪽으로는 [[숙신]](肅愼), [[거란]]의 [[비려]](碑麗)를 복속게 했으며,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쇠약해진 부여와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영락 (고구려)|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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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왕과 북위의 전쟁 ===
위서의 고구려전에는 高麗 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黠虜, 實得征之이라고 쓰여 있으며 고구려가 해외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오랑캐들인 구이(九夷)들을 모두 정벌하여 왔다고 나타나 있다.<ref>위서正始 中(504-507)</ref>
 
남제서 고구려전에서는 북위가 고구려의 사신과 남제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하여 고구려와 남제를 동급의 국력으로 취급하여 남제의 사신이 북위의 사신에게 항의하였으나 북위의 사신이 답하길 "그 자리도 높은 자리이니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라고 답하였다.<ref>此閒坐起甚高 足以相報</ref> 그리하여 남제서에서는 "고구려가 북위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냈지만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ref>남제서 58 고구려전 亦使魏虜,然彊盛不受制</ref>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은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장군을 보내어 북연의 수도인 용성(조양)에서 북위의 군대와 대치하였다.북위의 장군 고필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놀라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가였다.그리하여 갈로와 맹광 장군의 고구려군은 북연의 수도인 용성을 함락시키고 북연의 왕과 백성들을 고구려로 끌고 갔다.
 
북연의 왕, 한족 풍홍은 고구려가 풍홍을 매우 낮게 대하자 송나라에게 사람을 보내 구출을 요청한다. 장수왕을 그리하여 손수와 고구 등을 보내어 중국인 한족(漢族) 풍홍의 모후와 처자만 남겨두고 풍홍을 죽인다. 송나라는 왕백구와 7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손수와 고구를 몰래 공격하여 죽인다. 장수왕은 왕백구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사로잡고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송나라는 고구려의 뜻대로 왕백구를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놓아주었다.
 
435년 북위의 조양에서는 당시 전쟁에 만회를 하기 위해 고구려의 정벌을 논의한다. 그러자 북위의 낙평왕 비(丕)의 주청으로 중지하고 말았다. 대신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이오를 고구려에 파견한다.이오는 고구려가 조씨가 세운 위나라때보다 인구가 3배는 된다고 보고하여 고구려의 강성함을 알렸다.
 
북위 헌문종(465-471)의 부인 문명태후는 고구려에 청혼을 요청하고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李敷)등을 고구려의 국경까지 보내어 폐물을 보내는 등 예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수왕은 거절하였다.
 
 
헌문종 다음의 효문종에게 고구려 장수왕은 혼인을 강하게 요구하여 효문종은 고구려인인 문소태후와 결혼하고 선무종(499-515)를 낳았다.문소태후의 형제인 고조(高肇)일당이 선무종의 집권시기에 크게 세력을 키워 북위의 정권을 잡는다.<ref>延興(471-476)末 高麗王璉求納女於掖庭顯祖許之</ref>
 
장수왕 이후의 고구려의 문자명왕때는 고구려는 북위를 위해 사당을 짓거나 애도를 표하지 않았으나 북위는 고구려 위세에 눌려 스스로 애도와 예의를 표했다. 위서에는 북위의 권력을 잡은 선비족 영태후가 동쪽 사당에 장수왕의 애도를 표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508년에 북위의 선무종가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짓기도 하였다.
520년 고구려는 북위를 공격하였다.대릉하 유역의 중심 도시인 조양에 발견된 한기의 묘지명에 평주사마 자의참군직에 있는 한상이 고구려군이 북위를 공격하였을 때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왔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유연과 함께 지두우족(현 몽골족)을 분할 점령하려고 한다.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북조를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북조의 사서에 적혀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한성]](漢城)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정복하였고, 그로 인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를 정복하고 멀리 내몽고의 대흥안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ref>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ref>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ref>[[중원고구려비]]</ref>
 
=== 국력의 쇠퇴 ===
[[파일:Goguryeo tomb mural.jpg|섬네일|왼쪽|[[무용총]] 수렵도.]]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 }}</ref>
 
 
=== 수나라와의 전쟁 ===
{{참고|고구려-수 전쟁}}
 
북위에서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무천진 선비족들은 2세기부터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선비족과 경쟁하며 요동과 만주, 북연 등 중국인들을 정복하였는데 고구려보다 더 많은 남쪽의 중국인 한족들을 정복하여 예속시킨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고구려에 친조를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고구려인 강이식이 "칼로 대답하자"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수]]나라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전쟁이 있었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에 군대를 향하게 하여 요서를 선제 공격하여 정복하자 이를 계기로 수나라의 수 문종은 수나라군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수나라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12년]] [[수 양종]]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종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수나라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수나라군을 물리친다. 결국 수 양종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하고 죽었다([[살수대첩]]). 결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켜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 당나라와의 전쟁 ===
{{참고|고구려-당 전쟁}}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옛 한군현을 되찾고 난신적자 연개소문을 치겠다며 공격해 왔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는 당나라가 소모전으로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왔으나 그 때마다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에게 패하였고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평양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처했으나 당나라군을 패망시키고 고구려는 승리하였다.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고 무천진 선비족이 한족들을 예속시켜 세운 당나라는 국력이 세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파탄하였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
{{참고|평양성 함락}}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연남산 형제 사이에 막리지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고구려의 마지막 보장왕의 아들 [[안승]](고안승)이 신라에 귀순하여 김씨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 일대에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모두 수복하고, 동북쪽 영토를 고구려보다 더욱 확장했다. 발해는 매우 번영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도 불렸다.
 
== 정치 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