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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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인출신으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安珦) 배향하고,사우(祠宇)를 유생들의세워 교육을봄·가을 겸비한제향하고 공간인이름을 '''백운동서원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을 건립한 것이이라 이 서원의 시초이다했다.
 
이후 [[1548년]](명종 3)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이 조정에 사액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여, [[1550년]](명종 5)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지고,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과 노비도노비까지 내려졌다하사했다.
 
한국우리나라 최초의‘서원의 사액서원으로효시’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55호로 지정되고, [[2019년]]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개요 ==
영풍군은 본디 영주, 풍기, 순흥 세 고을이 비슷한 규모로 솔밭처럼 나뉘어 오랜 역사를 이루어온 곳이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조선 중종|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에이곳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에 안향의 사당을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고 하였다.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 학규(白鹿洞 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년]](중종 40) 에 [[안축 (고려)|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아가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주세붕이 처음 서원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1546년]](명종 1)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협조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운동서원이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다.
[[1550년]](명종 5)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내렸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1550년]](명종 5)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내렸다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이것은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