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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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중구 (인천광역시)|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도로명:신포로)에 위치한 [[인천항]]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부|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부기]]를 할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아,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여사를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ref name="Gajok"> [http://www.kjtimes.com/mobile/article.html?no=19403 [재벌가족사]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2013-05-15]</ref>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4/30/201004300500020/201004300500020_3.html [세기의 철녀들 23]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 신동아, 2010년 5월 10일</ref>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081795247 故 정주영 명예회장 부인 변중석여사 별세] 한국경제, 2007년 8월 17일</ref>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식량배급제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복흥상회를 [[폐업]]해야 했다.
 
=== 기업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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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