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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영조 47)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 종향(從享)을 청하였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이후 [[1786년]] (정조 10) 8월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등, [[1786년]] (정조 10) 10월 팔도 유생 ‘정헌’(鄭櫶)등, [[1789년]] (정조 13) 4월 팔도 유생 ‘심익현’(沈翼賢) 등, [[1789년]] (정조 13) 8월 팔도 유생 ‘신광례’(申光禮) 등, [[1790년]] (정조 14) 3월 팔도 유생 ‘이악겸’(李岳謙)등, [[1796년]] (정조 20) 6월 팔도 유생 ‘이명채’(李明彩)등, 방외(方外) 유생 ‘김무순’(金懋淳)등, 가을 7월 경기・호서・호남 삼도의 유생 ‘이종호’(李種祜)등, 팔도 유생 ‘채홍신’(蔡弘臣)등, 8월 경외(京外) 유생 ‘정대현’(鄭大賢)등・경외(京外) 유생 ‘이규남’(李奎南)등, 9월 관학 유생 ‘심내영’(沈來永)등・관학 유생 ‘이광헌’(李光憲)등이 [[문묘]] 종사를 소청(疏請)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9월 17일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문묘]] 종사를 청하자, [[조선 정조|정조대왕]]은 선정신 [[김인후]]는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요, 도학 연원의 정통으로 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다며 윤허하였다. 그해 11월 8일 예관을 보내어 문선왕묘(文宣王廟)에 술잔을 올린 후, [[문묘]] 종사 의식을 행하고 교서를 선포하였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