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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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Lt Cmdr Richard Nixon 1945.jpg|섬네일|left|[[해군]] [[소령]] 복무 시절의 닉슨]]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넉넉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집안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동부로 진학하는 것을 단념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휘티어위티어 대학교]]에대학교에 들어갔다입학했다. 1934년 위티어 대학 졸업 후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듀크 대학교 법학대학원|듀크 대학교 로스쿨]]에 3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전교(graduating class) 3등에 드는 최고 수준의 성적으로 1937년 6월에 졸업하였다. 그 후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 시험(bar)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 정계 활동 ===
[[파일:Ike Dick.png|섬네일|left|[[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와 닉슨의 선거 포스터]]
리처드 닉슨은 위티어 지역에 위치한 윈저트 앤 뷸리(Wingert and Bewley)라는 [[로펌]]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했고, [[1940년]] 6월 21일에 취미로 연극 활동을 하던 중 만나 교제하던 고등학교 교사 텔마 "팻" 라이언(Thelma "Pat" Ryan)과 결혼했다. [[1942년]] 1월 닉슨은 물가관리청(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으로 이직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워싱턴 DC]]로 이주했다. 하지만 닉슨은 이 일을 즐기지 못했으며 4개월 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불과 39세의 나이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닉슨은 유권자들로부터 1만 8천 달러를 받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정치 스캔들에 휘말렸다. 선거 기간에만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다는 규정을 어겼으며, 돈이 정치 활동에만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수용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여론은 사퇴를 요구했다.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개인적인 용도로 돈을 전혀 사용한 적이 없다며 유권자에게 개인 선물로 받은 것은 자신의 애완용 개뿐이라고 연설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선거 결과는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과반수 이상 차지하게 되었고, 닉슨은 미국의 36번째 부통령이 되었다. [[1953년]] [[1월 20일]] 4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고, [[1956년]] 재선되어 43대 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파일:Ike Dick.png|섬네일|left|[[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와 닉슨의 선거 포스터]]
[[1960년]]에는 [[공화당 (미국)|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0년]]에는 [[공화당 (미국)|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존 F. 케네디]]와 치열한 접전 끝에 패하였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뉴욕 시|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68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재선되었다. 이 빛나는 승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임기 중 사퇴라는 치욕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1962년]] 캘리포니아 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뉴욕 시|뉴욕]]으로 이주하였다.
 
[[1968년]] 다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미국 제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매사추세츠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승리하며 재선되었다. 이 빛나는 승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발목이 잡혀 임기 중 사퇴라는 치욕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 외교 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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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터게이트 사건 ===
{{본문|워터게이트 사건}}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1973년]] 여름까지 공모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23일]],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연방수사국]]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녹음된 말이 공개되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침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 공개된 이 녹음은, 이른바 연기뿜는 총([[스모킹 건]])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수반인 대통령 누구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 뒤, 의회는 [[탄핵]]을 준비하였다. 탄핵이 확실시되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제럴드 포드]]가 취임한 지 한 달 뒤, 그를 특별 사면시키는데, 그 당시 닉슨에 대한 험악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선 커다란 정치적 모험이었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는 재선에 실패한다.
 
언론에 공개된 이 녹음은, 이른바 연기뿜는 총([[스모킹 건]])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들은 [[도덕]]성이 높아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 뒤, 의회는 [[탄핵]]을 준비하였다.
 
탄핵이 확실시되자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제럴드 포드]]가 취임한 지 한 달 뒤, 그를 특별 사면시키는데, 그 당시 닉슨에 대한 험악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선 커다란 정치적 모험이었고, 대통령직을 이은 포드는 재선에 실패한다.
 
=== 퇴임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