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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흠정만주원류고]]》를 간행한 청대 학자들은 안출호(按出虎, [[여진어]]: Antʃun)를 아륵초객(阿勒楚喀:({{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Alcuka}}로 읽으면서 안출호가 금을 뜻한다는 《[[금사]]》지리지의 기술을 [[원나라]] [[사관]]의 억지로 판단하여, 금 시조 [[함보]]의 출자가 [[신라]]임이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았다고 추측했다.
 
금나라는 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 역사 ==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 통치자가 [[동단국]]의 발해인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제어가 어렵다는 이유로 서천시키자 발해의 옛 지역은 점점 비세 되어 [[흑수말갈]]이 발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에 여진은 통일되지 못하여 여진의 어떤 부족 혹은 부락연맹을 가리킬 뿐이었다. 동단국이 서천한 이후에 여진은 [[고려]]에 신속되거나 혹은 거란에 신속했다.<ref name="Na">{{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1}}</ref>
 
[[요 흥종]]과 [[요 도종]] 시기에 이르러 [[생여진]]의 [[완안부]]가 점차적으로 강성해지면서 생여진의 각 부를 복속시키는 동시에 거란 조정의 대리인 자격을 획득하였다. 완안부는 거란인의 능멸과 학대에 고통받게 되자 거란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흥기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조제]]가 사냥과 술을 좋아하여 정사를 태만하게 하자 [[완안 아골타]]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가졌다.<ref name="Na"/>
 
거란의 통치계급이 여진의 토산품을 강제로 징수하거나 저가로 수매하는 경제적 착취는 정치적 압박과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고,<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1~62}}</ref> 거란 통치자는 여진지역의 큰 바다에서 북주(北珠)를 얻어 북송의 고급사치품과 교환했는데, 진주를 채취하는데 유용한 맹금류인 해동청의 포획을 문제를 두고 거란 통치자와 여진의 각 부의 갈등이 악화됐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3}}</ref>
 
이러한 해동청의 징발은 더 이상 생여진 부족장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마침내 1096년에는 흘석렬부(紇石烈部, {{llang|juc|/xə-ʃĩri-ə fama-a/}})의 아합관과 석로가 오국부로 통하는 응로를 차단하고 거란의 포응사자를 살해하자 거란은 생여진 절도사인 완안부의 [[완얀 잉게|영가]]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거란이 영가를 응로지전이 참여시켜 응로를 원할하게 만들고자 했던 반면 영가는 거란의 위세를 빌어 여진 각 부를 병합하고자 했다. 영가가 병사한 후에 형 핵리발의 동생인 [[완얀 우야수|오아속]]이 절도사직을 계승하면서 여진 부족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고려]]와도 협조하였다.<ref name="Nam">{{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4}}</ref>
 
한편 거란 황제가 매년 가을 사냥을 할 때면 여진 수령은 그곳으로 가서 조견해야 했으나 그것이 너무 고생스러워 불만이 팽배해졌다. 1112년에 [[천조제]]가 [[송화강|혼동강]]에 도착하여 낚시를 했는데 무릇 천리 이내에 있는 여진 추장들은 관례에 따라서 그를 접견해야만 했다. 이때 아골타는 그의 동생인 [[금 태종|오걸매]] 및 점한, 호사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술자리에서 천조제는 여진의 추장들에게 춤을 추도록 하였으나 아골타는 이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조제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주변의 만류로 일단 중지하였다. 혼동강의 연회에서 돌아온 아골타는 이후 지금의 [[휘발하]] 유역의 요적의 여진 부락들을 더욱 병탄하였다. 그 부락들의 추장 중에 조삼하골산이 거란으로 도망가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자 거란 조정에서는 완안부에 사자를 파견해 책임을 물었다. 아울러 몇 차례 아골타에게 입조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매번 병을 핑계로 입조를 회피했다.<ref name="Nam"/>
 
완안부는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졌고 거란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아골타는 흘석렬부의 반인 아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계속 거란의 허실을 탐색하였고, 마침내 1114년 9월에 아골타가 영강주로 진군하였으나 천조제는 경주에서 사냥만 하였다. 단지 해주자사 고선수에게 발해군을 거느리고 대응하여 구원하게 하였다가 대패했다. 영강전투에서 승리하자 아골타는 포로로 잡힌 방어사 대약사노를 비롯한 발해인 장수들을 방면함으로써 발해인을 투항하도록 회유했다. 또한 여진에 투항한 발해인 양복과 알답자를 고향으로 보내 발해인들을 회유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인데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죄인을 정벌하는 것으로 무고한 사람이게 함부로 미치지는 않는다."라고 선동하게 하는 한편 대장 완안 루실을 요동 남쪽으로 파견해 계요적여진을 회유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5}}</ref>
 
영강주의 전쟁이 끝난 직후인 11월에 거란은 소규리를 도통, 소달불야를 부도통으로 삼아 영강주에서 멀지 않은 압자하 북쪽에 거란 및 [[해족|해]]의 보병과 기병 10만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여진군은 압자하를 건넌 뒤 출하점에서 거란 측 병력을 궤멸시켰다. 영강주와 출하점의 대승을 거둔 아골타는 그의 동생 [[금 태종|오걸매]] 및 살개, 발해인 양박 등의 권유로 1115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금(大金, {{llang|juc|/amba-an antʃu-un/}}), 연호를 수국(收國, {{llang|juc|/gurun baxa uai/}})으로 선포했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6}}</ref>
 
영강주 및 출하점, 호보답강 전쟁에서 요군의 연패는 피지배 종족의 반요투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들의 이반은 다종족국가였던 거란을 한 순간에 붕괴시켰다. [[한족|한인]]이던 발해인이던 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통치자를 선택하였다. 이때 동북 지역의 제 종족, 특히 발해인은 유대감을 지닌 금에 협력하였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7}}</ref>
 
천조제는 자신을 배반한 야율 여도가 이끄는 금군의 공세를 피해 1122년에 협산으로 파천하였다. 이때 [[연경]]를 지키던 번한관료들, 즉 이처온 부자는 천조제와의 연락이 단절되자 소간, [[야율대석]], 좌기궁, 우중문, 등과 함께 원군의 후원을 빌어 천조제를 상음왕(湘陰王)으로 격하시키고, 위국왕 [[야율순]]을 천석황제(天錫皇帝)로 옹립하여 북요(北遼)가 성립됐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year=2017|isbn=9788979405538|page=269}}</ref>
 
두 개로 분열된 요는 더 이상 북송과 금의 협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금은 [[상경임황부|상경]] 및 [[중경대정부|중경]]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서경대동부]]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황태후가 된 덕비 소씨가 지키던 거용관도 무너져 [[연경]]은 금군에게 함락되었다. 1125년 2월 천조제는 협산에서 나와 당항으로 도주하다가 금군의 완안 루실에게 사로잡혀 상경으로 끌려가 해빈왕(海濱王)으로 책봉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나영남|authorlink=|title=요·금시대 이민족 지배와 발해인|series=외대 역사문화 연구총서|publisher=신서원|isbn=9788979405538|page=269~271}}</ref>
 
아골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오걸매는 곧바로 북송 공략을 시작해, 1126년에 수도인 [[카이펑|개봉]]을 함락하고 황제 [[송 흠종|흠종]]과 상황 [[송 휘종|휘종]]을 모두 포로로 붙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켰다. 송의 황실과 귀족은 남쪽으로 도주하여 [[남송]]을 개국했다. 그러나 금은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여 1142년 '황통(皇統)의 강황'를 맺어 화이수이를 양국 경계로 삼았고, 남송은 매년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공물로 바치기로 합의했다. 이는 1005년 북송과 거란이 맺었던 '[[전연의 맹]]'보다 훨씬 더 가혹한 것으로서 금이 정복왕조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김호동|authorlink=|title=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series=아틀라스 역사 시리즈|publisher=사계절|isbn=978-89-5828-932-6|page=119}}</ref>
 
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뒤이은 [[금 장종|장종]]은 중국 문화에 정통했지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데다 황하 범람과 몽골계 유목민이 침입해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실지 회복을 노리는 남송의 도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금 위소왕|위소왕]]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금 선종|선종]] 때인 [[1214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변경으로 옮겼지만, 한인과 불화가 깊어져 더욱 혼란에 빠졌다. [[금 애종|애종]]은 변경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뒤이은 [[금 말제|말제]]도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은 10대 120년 만에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