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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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이량 (조선)|이량]], [[윤원형]]과 함께 삼흉(三凶)이라 불렸다.<ref>[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11/20081023/20081023004900.html 조선의 붕당정치를 해부하다(4) : 프로메테우스] 2008.10.23</ref> 혹은 [[이기 (1476년)|이기]], [[윤원형]]과 함께 삼흉으로도 불렸다.
 
==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이 되다 ==
{{인용문|[[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 이후 6년 뒤인 [[1549년]] 후임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퇴계 [[이황]]의 문인 [[심의겸]]의 종조부)에게 편지를 썼다.
 
때는 [[1545년]] [[을사사화]]로 사림 출신 정치가들이 집단으로 숙청된 이후였다.
 
"(서원) 이름이 역사에 수록되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전해지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근재집(謹齋集), [[이황]], '방백 [[심통원]]에 올리는 편지(與沈方伯通源 書)')
 
[[백운동서원]]을 국가가 공인해달라는 편지였다.
 
이듬해 [[1550년]]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조선 명종|명종]]왕비 [[인순왕후]]와 [[심의겸]]의 조부)이 [[백운동서원]] 이야기를 꺼냈다.
 
막강 실세 [[심연원]]은 경상관찰사 [[심통원]]의 친형이다.
 
"백운동에 땅과 노비는 있으니 이름과 책을 하사하시라."(1550년 '명종실록' 2월 11일)
 
두 달 뒤 [[조선 명종|명종]]이 '紹修(소수)'라는 이름과 책을 백운동에 내리니, 이게 영주에 있는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왕이 현판을 내린) 서원, [[소수서원]]이다.
 
국가가 사설 교육기관 서원을 공인한 것이다.
 
이후 사액서원 토지에는 세금이 면제되고 서적과 노비가 하사되는 관행이 법제화됐다.|2019년 1월 30일 조선일보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뭄 구제보다 중한 것이 교화로다!" <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424699 2019년 1월 30일 조선일보 -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가뭄 구제보다 중한 것이 교화로다!"]</ref>}}
 
== 심통원을 연기한 배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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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억령]]
* [[전우치]]
* [[이황]]
*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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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선의 외교관]]
[[분류:을사사화 관련자]]
[[분류:이황]]
[[분류:이이]]
[[분류:과거 급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