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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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현재 [[성균관]] 및 각 지방의 [[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을 배향하고, [[공문십철|공문10철]] 및 송조 6현과 우리나라 [[동방 18현]]의 신위를 종향(從享)하고 매년 춘추 향사하고 있다.
 
== 종사문묘 기준종사 ==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므로 문묘 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었던 대부분의 문묘 종사는 도학(道學, 성리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선비만이 당당히 [[공자]]의 옆자리에 종사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ref>〈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저자 김용헌, 2010, 프로네시스. "인조 즉위 직후 서인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조선시대의 문묘 종사는 도학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학문이나 진리의 문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문묘 종사만큼 학문과 권력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