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Daayannn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43번째 줄:
{{중국의 역사}}
 
'''당''', (唐, [[618년]] ~ [[907년]]) 또는 '''당나라(唐羅羅)'''{{sfn|Wilkinson|2013|p= 6}}은 [[수나라]]와 [[오대 십국 시대]] 사이에 존재했던 중국의 왕조이다. 역사학자들은 당나라를 중국 문명의 최전성기, 그리고 국제적 문화의 황금시기로 간주한다.{{sfn|Lewis|2012|p= 1}} 당나라 초기 황제들의 군사 활동을 통해 당나라의 영토는 확장되었으며, 이 영토는 [[한나라]]에 견줄만 하다. 당나라의 수도는 오늘날 [[시안]]인 [[장안]]으로, 동시대의 어느 도시들보다도 인구 수가 많았다.
 
[[이연]]은 수나라의 쇠퇴와 붕괴 시기에 권력을 잡아 당나라를 건국했다. 7세기와 8세기의 당나라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정부에 등록된 인구 수는 약 5,000만 명으로 추산된다.{{sfn|Ebrey|Walthall|Palais|2006|p= 91}}{{sfn|Ebrey|1999|pp= 111, 141}} 중앙 정부가 붕괴되어 인구 수를 제대로 조사하기 어려웠던 9세기에도, 당나라의 인구 수는 8,000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고 추산된다.{{sfn|Du|1998|p= 37}}{{sfn|Fairbank|Goldman|2006|p= 106}} 이러한 인구 수 덕분에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유목민을 상대로 전문적인 징집병을 양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비단길]]을 장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왕조와 국가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일부 지역은 당나라가 직접 정복해 간접적 통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적 헤게모니를 넘어서 당나라는 [[발해]], [[신라]], [[베트남]], [[일본]]과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각국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는 오랫동안 안정된 정치를 유지했으나, [[안사의 난]] 이후 중앙집권체계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사대부]]들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이들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관리들의 추천을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다. 9세기에 [[절도사]]로 알려진 지역 군 통치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통치 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 문화]]는 당나라 시기에 더욱 발전하였다. [[중국 도자기]] 문화가 이 시기에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고 있다.{{sfn|Yu|1998|pp= 73–87}} 중국의 유명한 시인인 [[이백]]과 [[두보]]가 당나라 시대에 살았으며, 유명한 화가들인 [[한간 (당나라)|한간]], [[장훤]], [[주방 (당나라)|주방]]도 당나라 사람이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다양한 역사책을 출간했으며, 지리서와 백과사전도 많이 출판되었다.{{sfn|Skaff|2012|p= 127}} [[목판 인쇄]]의 발달과 같은 수많은 기술적 혁신도 당나라 시대 때 일어났다. 당나라 시대에 [[불교]]가 중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확산되었고, 중국 고유의 불교 종파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당 무종]]이 [[회창의 폐불|폐불]]을 선언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9세기에는 왕조와 중앙 정부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예술과 문화는 계속 융성했다. 또한 9세기에도 여전히 당나라의 상업 활동과 무역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관료제 전체가 타격을 입었고,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