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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1900년]](호적상 [[1902년]]) [[울릉도]] 출신이고, [[울산]]에서 성장 후,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관술 집안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9년]]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체벌을 하지 않은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것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당시 동덕여고보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 재학 중이었다. 1930년 3월에 동덕에 편입한 뒤 [[이효정]]의 동기로 함께 어울렸고 후에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다. 이관술은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을 묶어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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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전쟁 발발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
|출판사 =오마이뉴스
|날짜=2015.04.02}}</ref>
산내학살사건의 주범은 [[심용현]]이었다. 심용현 중위는 산내 학살현장에서 모든 사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했다.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그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229222
|제목=[박만순의 기억전쟁] 주저하는 부하 다리에 사격... 3200명 학살하고 승승장구한 군인
|출판사 =오마이뉴스
|날짜=2019.06.04}}</ref>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벌어졌다. 4인의 독지가가 땅을 기부했는데, 총 5715평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인 중에 이관술이 포함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범서면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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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19.04.27}}</ref>
울산에서는 이관술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다. 이관술 생가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으며, 현재 소유주가 집을 매각하려고 한다. 또한 생가 옆 작은 텃밭에는 이관술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 2019년 4월 24일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창립해 평생을 조국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이관술 기념관을 추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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