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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 안동]]. [[병자호란]]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의 직계후손이며 [[예조판서]] [[김응균]]의 아들이다.
 
판사대신 주일공사(駐日公使)를 역임하고 [[갑오개혁]]때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으나,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않았다주어졌다.
 
1919년 [[의친왕]] 망명기도사건에 가담하였고, 자신 역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아호가 동농이므로 '''동농 김가진'''으로 부른다.<br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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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6월, [[대한협회]](大韓協會) 회장에 취임, 대한민보를 발행등으로 국가주권 회수에 나섰으며,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一進會와 대립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男爵) 작위가 주어졌으나 이후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주어졌다.<br />
1919년 3·1운동 직후,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은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 비밀조직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하며, 김가진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10월,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金毅漢)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상하이로 망명을 결행하며, 김가진은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로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망명 도중 중국 안동 (현재의 단동)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1920년 3월에는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br />
1922년 7월 4일 77세를 일기로 상해에서상하이에서 순국했다. 임시정부가 주관,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로도 유명하다. 미불(米芾)체와 동기창(董其昌)체에 능했다.
 
== 사후 ==
그러나 남작수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등의 이유로,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각각 독립장과 애족장을 서훈받은 독립운동가들이다.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 김가진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www.google.co.kr/maps/place/37%C2%B034'38.2%22N+126%C2%B058'19.8%22E/@37.577265,126.9716058,19z/data=!3m1!4b1!4m5!3m4!1s0x0:0x0!8m2!3d37.577265!4d126.972153?hl=en|제목=김가진집 터 표석 위치}}</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