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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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대혁명 =====
{{본문|문화 대혁명}}
그 후 경제를 재건할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류샤오치]]가 대립하였고, 마오쩌둥은 권력 탈환을 위해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켰다. 혁명 중 마오쩌둥으로부터 “반혁명파”라고 규정된 많은 사람이 탄압당하거나 [[학살]]당하여, 국내는 일시 내란 상태가 되었다. 또 [[불상]] 등의 중국 각지의 귀중한 전통 문화재도 “반혁명”적인 존재로서 파괴되었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고, 일단 [[화궈펑]](華國鋒)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당시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는 [[문화 대혁명]]의 반 전통적인 면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는 [[문화 대혁명]]의 반 전통적인 면을 비판하였다.
 
===== 간체자 보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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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샤오핑 시대와 현재 ====
[[파일:Flickr - Shinrya - Shanghai Skyline HDR.jpg|섬네일|right|[[상하이]] 고층건물들의 야경]]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후부터 당시 초강대국이였던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영향력에서부터 자유롭게 미국과 서방 세력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를 견지함과 동시에,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현대화를 진행했다. 실제로 덩샤오핑은 프랑스 유학 시절 르노자동차에서 근무함으로써 서유럽의 시장 경제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고 할 만큼 경제가 급발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급격한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의 확대와 환경 파괴가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중국은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위협하는 활동이나 중국의 분열을 촉진할 수 있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이는 [[1989년]] [[1989년 톈안먼 사건|톈안먼 사건]] 진압과 [[2005년]] [[반분열국가법]] 성립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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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 ===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영장]] 없는 자의적인 체포 등의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법은 [[1949년]] 당시 초강대국이던 [[소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 소련 [[법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고, [[1979년]] 이후 경제 현대화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 등지의 투자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되고 있다.
 
=== 대외 관계 ===
{{본문|중화인민공화국의 대외 관계}}
[[파일:Hu Jintao Bush.jpg|섬네일|250px|오른쪽|[[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유 경제 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것은 [[분단국가]]인 [[중화민국]]에 대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국의 정통한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조 하에서, 건국 당초에는 완전히 동측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의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ref>1964년 1월에~: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60년편 3권) (2004년, 인물과사상사) 19쪽.</ref>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과 수교하는 등 서방 측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고, 동시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나라와 [[소련]]과의 대립 관계의 미묘한 밸런스의 중간에서 {{모호}},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한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기정 사실을 서방측의 다수 국가로부터 확인받아 하나의 중국 정책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 이후부터 경제 면에서의 민주주의인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2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한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 섬|타이완]]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타이완을 실효적으로 통치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국제 연합|UN]] [[국제 연합 가입국|회원국]] 중 [[중화민국#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22개국]]([[바티칸]]은 준회원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ref>{{뉴스 인용 |url= http://www.chinadaily.com.cn/english/doc/2004-06/08/content_337598.htm |제목= Major events in Sino-Polish relations | 날짜= 2004-06-08 | 출판사= China Daily }}</ref><ref>[http://www.mfa.gov.cn/eng/wjb/zzjg/xos/gjlb/3210/ Poland]</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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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天安門 廣場)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1949년]] [[10월 1일]] 건국 및 선포를 하고,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때,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일에 단독으로 38선으로 돌파하여 북진통일을 할 수 있던 순간에 [[10월 25일]], 중국 공산군(중공군)의 60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인해전술]]과 각가지의 전술로 한국군과 UN군에게 막대한 인명, 물자 피해를 남겨주면서 전쟁의 양상이 새로 바뀌어졌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이후, 중국과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을 추진하면서, 단절되었던 민주·자본주의 국가들과 다시 수교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1992년]] 8월 24일자로 국교를 수교하면서 물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2015년]] 최근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우익세력들이 역사교과서를 왜곡과 편찬, 과거사에 대한 부정·왜곡과 영유권 억지 주장으로 인해 중국과 한국이 서로 상호 협력하는 단계로 발전되고 있다.
===== 외교관계 맺기 이전의 관계 =====
북방 정책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에 비하여 그다지 매력적으로매력적인 느끼지시장은 않았다. 소련에 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1980년]]대에 경제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관계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아니였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적 관계를 맺기 이전의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사람과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디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과 미국간, 북한과 일본간의 중재, 북한, 대한민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 상호방문 허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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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붕괴 이후 =====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실상 소련의 막대한 영향력에서 아래에서 벋어난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서방세력 외에도 대한민국과 수교하기 이른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ref>{{웹 인용|url=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제목= 한-중 수교 (1992.8)|확인날짜= 2009-07-11|형식= |웹사이트= 국가기록원 나라기록|저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11012073757/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보존날짜= 2011-10-12|깨진링크= 예}}</ref> [[1992년]] [[8월]]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수교와 동시에 많은 문화교류를 통해서 한류 및 중류(中流)가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2008년]] [[4월 27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08년 하계 올림픽|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재한 중국인 및 중국인 유학생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한국인]] 및 [[외국인]]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2008년 중국인 성화봉송 폭력시위 사건]]) 이 때문에 각국 사이에 반한·반중 감정이 생겨나는 등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중화인민공화국 수출은 1168억3783만USD, 중화인민공화국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715억7360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의 수출, 수입국이다. 한편, 대한민국의 대(對)홍콩 수출은 252억9434만USD, 홍콩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9억4593USD(각 2010년)에 달하여, 홍콩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4위의 수출국, 제32위의 수입국이다.<ref>{{웹 인용 |url= http://stat.kita.net/ | 제목 = 국가별 수출입 | 출판사 = 한국무역협회 }}</ref> 양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ref name="biz.chosun.com">{{뉴스 인용 |url =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5/2010090500823.html | 제목 = 중국 노선 탑승률 사상 첫 80% 돌파 | 출판사 = 조선일보 | 날짜 =2010-09-06}}</ref> 대한민국 남자들의 국제결혼을 아내의 출신지 별로 볼 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여자가 가장 많다. 2000년 3,566건 (전체 6,945건 중 51%)에서 2008년 13,203건(전체 28,163 건 중 46.8%)으로 증가하였다.<ref>{{웹 인용 |url= http://www.kosis.kr |제목= 한국인 남편의 혼인종류/외국인 아내의 국적별 혼인 |확인날짜=2009-07-11 |형식= HTML |웹사이트= 국가통계포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