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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몽재 훈학 ====
[[1548년]](명종 3) 봄에 어버이를 모시고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寓居)하여,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재 유지|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군|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정|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9년]](명종아듬해 4) 봄 2월에 ≪대학강의(大學講議)≫ 발문(跋文)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天命圖)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0월에10월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12월에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맥동 원당골에 장사하였다.
 
==== 인종에 대한 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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