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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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1945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미군]]과 [[소련소련군]]의 군정이점령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려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1945년 8·15광복으로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고,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ref>[[중국 공산당]]은 1949년에1949년 10월 01일 [[중화민국중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중공(中共)이 국부(國府)를 물리치고 대륙에 공산정권을 세웠으며, ”--></ref>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현대사회의 발달/시련과 민주주의의 발전/6·25전쟁#전쟁발발 직전의 정황|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 1949년 6월에 이미 주한 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했으며 ”--></ref>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1200329201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1-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051&publishType=00020 美의 對極東防衛線은...]〉 《京鄕新聞》 (1950년 1월 12일) 1쪽. <!--“애치슨 國務長官은 美國의 極東防衛線이 臺灣東쪽에 있다고 宣言하였다. 則 「애」 長官은 十日의 上院外交委員會의 秘密會談에서 美國의 太平洋防禦線은 臺灣의 東쪽에 있으며 日本沖縄 比律賓을 連絡하는 線이라고 말하였다. 이 애치슨 長官의 言明은 秘密會談後 코나리- 上院外交委員長으로부터 發表
된 것이다.”--></ref>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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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국의 군정기}}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9-06-25}}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절|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임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 즉, 한국 전쟁을 [[대리전쟁|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남북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는데 즉,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옛날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을 때에 백제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38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38선 북쪽으로선 개마고원을 경계로 [[평양]], [[개성]], [[남포]], [[신의주]], [[해주]]을 포함한 서부 지역은 [[중화민국]]이 동부 지역 [[원산]], [[금강산]], [[함흥]], [[흥남]], [[장진]], [[혜산진]], [[청진]], [[나진]]을 포함한 곳은 [[소련]]이 점령해서 5년 간 신탁 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에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이국민당이 [[중화공산당에게 인민 공화국]]에게 져서패배하고 38선 북쪽의 서부지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공산당으로 넘어가 서부 지역도 공산국가가 되므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떼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1891년)|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 = 박명림 |제목 =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쪽= 303~304 |출판사= 나남출판}}</ref>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kathw">[https://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CWIHPBulletin3.pdf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ref> 공개된 구 [[소련]]의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북한군]]이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무기들을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북한으로 제공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력 강화와 전쟁준비 교섭 ====
{{참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한국 전쟁의 준비}}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ref>Max Beloff, ''Soviet Foreign Policy In the Far East,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52, pp.177</ref> 이러한 이유로 한국 전쟁 당시 소련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돕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한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1 |쪽 = 5 |인용문 = <!-- ◇ 대남공격 제의 △ 49.8.12=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한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음을 보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 그들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남한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함. -->}}</ref>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ref>{{뉴스 인용 |url=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5&art_id=201006301514131 |제목 = <nowiki>[2010연중기획]</nowiki>한국전쟁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 |출판사 = [[경향신문사]]: [[주간경향]] |저자 = [[박태균]] |날짜= 2010-07-06 |인용문= <!--1950 년 초 북한의 조선노동당에서 이뤄진 제반 보고에서는 북한이 남한의 이른바 ‘혁명역량’에 대해 너무나 큰 오산을 하고 있었음이 잘 드러난다. 남한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가 월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 초 북한에서의 보고를 통해 남한에 수많은 혁명분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이 전쟁을 개시할 경우 남한의 혁명 세력은 모두 봉기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ref> 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대한민국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대한민국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에도 소련의 지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에 비하여 약세에 있었다.(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1 |쪽 = 5 |인용문 = <!-- ◇ 대남공격 제의 △ 49.8.27= 슈티코프 대사는 8월12~14일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림.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슈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ref>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1 |쪽 = 5 |인용문 = <!-- ◇ 슈티코프 보고서 △ 49.9.15= 슈티코프 대사가 스탈린에게 제출한 한반도 상황 보고서 –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함. - 슈티코프 대사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임.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음. -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함.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음. -->}}</ref>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을 [[스티코프]]를 경유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07-21 |쪽 = 5 |인용문 = <!-- ◇ 슈티코프 보고서 △ 49.9.24= 공산당 중앙위는 평양주재 대사에게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하달.-->}}</ref><ref>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1949년 9월 24일 북한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하달된 후,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