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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이후 ===
[[1990년]] [[3당 합당]]시 결국 참여를 거부, [[김영삼]] 등과 결별하고 함께 삼당합당을 거부한 [[노무현]], [[김정길]], 무소속 의원인 [[홍사덕]], [[이철 (1948년)|이철]]등과 함께 [[민주당 (대한민국, 1990)|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어 꼬마민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후 평민당과 야권통합협상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 6시 40분쯤 [[한국외국어대학교|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ref>[http://www.cathrights.or.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 보안사, 저명인사 1300명 사찰] {{웨이백|url=http://www.cathrights.or.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 |date=20120205163051 }} 천주교인권위 1990년 10월 5일자</ref>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 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켓을 공개하였다. [[1991년]] 개헌후 처음 벌어졌던 기초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9월 10일]] 합당에 합의하여 [[9월 16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서 "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과 함께 공동대표가 되어 [[1992년]] [[대한민국 14대 총선|14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해운대를 떠나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2년]] [[5월 26일]] 제14대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경선에서 [[김대중]] 대표최고위원에게 석패하였다. [[12월]]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일약 야당총수가 되었다. 1993-1994년에는 제1야당의 총수로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당내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동교동계와 번번이 신경전을 벌이며 주도권 다툼을 하였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공천권을 둘러싸고 동교동계와 잦은 충돌 끝에 결국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민주당은 여당을 밀어내고 서울시장을 차지하는등 지방선거에서는 사실상 승리하였지만, 이미 이기택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김대중]]은 [[동교동]]계 의원 전원을 민주당에서 탈당시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계에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