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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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등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24일]]에 [[박선호 (1934년)|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과 함께 [[서울구치소]](1987년 이후 의왕으로 이전되어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자리)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흥주]]는 신분이 현역 군인인 관계로 [[1980년 3월 6일에]] [[총살형3월 6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피고인 김재규에 대하여 1,2심에서 신속하게 사형선고가 이루어졌지만 대법원 형사3부에서 내란목적 인정 여부를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전원합의체에서 판단을 하여 사건 발생 후 207일 만인 1980년 5월 20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이영섭 재판장은 김재규 피고인 등 7명에 대해 내란목적을 인정하지 않아 원심판결의 파기를 주장하는 소수의견(민문기,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등 6인)보다 "유신헌법 자체가 주권을 찬탈한 불법적인 범법이거나 민주국가의 정치적 기본조직을 파괴한 것에 해당되어 그 자체가 내란상태라는 주장은 독단에 지나지 않으며 피고인들의 행위는 [[내란죄]]의 성립요건인 폭동에 해당된다. 저항권은 실정법에 근거가 없으므로 법관은 이를 재판규범으로 원용할 수 없다"는 다수의견(이영섭, 주재황, 한환진, 안병수, 이일규, 나길조, 김영철, 유태흥 등 8인)을 받아들여 상고기각을 결정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2600716 김재규의 10·26 사건 (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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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ref>{{서적 인용 |저자= [[돈 오버도퍼]] |제목= 두 개의 한국: The Two Koreas |날짜= 2002-07-25 |출판사= 길산 |쪽= 178}}</ref>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ref name="minteon01">「www.한국현대사.com」(김진국, 민연, 2000) 229페이지</ref>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ref name="minteon01" />
 
== 사건의 여파 ==
{{참고|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최규하 정부}}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승화]]를 신속히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 폐지로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군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1980년]] 가수 활동을 금지당하다가 [[1984년]] 복귀하였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간 후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1980년 내란죄가 확정돼 사형된 뒤에는 김재규의 사진과 이름이 모두 사라졌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김재규의 존재 자체를 금지했다.
 
김재규의 사진이 출신 부대에서 근 40년 만에 부활하게 된 것은 국방부가 지난 4월 역대 지휘관 사진물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국방장관 및 장성급 지휘관 사진 게시 규정 등 부대관리훈령'을 개정한 데 따른 것이다. 새 훈령은 역사적 사실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모든 역대 지휘관 및 부서장 사진을 부대 역사관이나 회의실, 내부 홈페이지 등에 게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진이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내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우·홍보를 목적으로 한 사진 게시의 경우에는 형법·군형법 등으로 형이 확정된 지휘관과 부서장은 제외된다. 국방부 측은 '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취지에서 훈령 개정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 사건 관련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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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자 ===
*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가슴과 머리를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안재송]] - 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권총에 맞고 살해당함.
* 김용섭 - 대통령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 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 생존자 ===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 [[박상범]] -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 [[심수봉]] - 가수
* [[신재순]] - 대학생
 
=== 사건 처리자들 ===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유고후 [[계엄]] 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 [[김정섭 (중앙정보부)|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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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 살인죄 무기징역
* [[박흥주]](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 [[박선호 (1934년)|박선호]](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자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이기주 (경비원)|이기주]](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김태원 (공무 경비원)|김태원]](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 [[유석술]](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증거 은닉죄 징역형 3년<ref>김재규가 사용한 총을 묻은 증거은닉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음, [http://jajoong.egloos.com/6316371 「심수봉 "김재규" 미리계획했는지 경직돼 있었다」]</ref>
* [[서영준]](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징역형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유신 정권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피고인 [[김재규]]의 주장과 재판기록을 검토하여 대법원 판사 6명이 "내란목적 살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제시했지만 상고기각이 있은 이후 5명이 신군부의 압력에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 제출을 거부한 정태원은 강제 해임되었다 이후 선임자였던 [[양병호]]가 1993년에 시사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0 . 26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저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뒤집을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ref>[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0656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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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관련 작품 ==
* 《[[그때 그사람들]]》은 10·26사건을 재구성한 [[임상수]] 감독의 영화이다.
* [[MBC]] 특별기획 수목드라마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1995~1996)과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2005)에서는 10·26 사건을 그리고 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