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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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wangbeokkun 194002.jpg|섬네일|400px|왼쪽|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1884년)|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1868년)|이시영]], [[차이석]]<br>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김문호]], [[신정숙]], [[김붕준]]<br>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지청천]], [[이범석 (1900년)|이범석]], 이름 미상]]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본제국|일제]]와 [[나치 독일|독일]]에 [[선전포고]](이 선전 포고는 일본 측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효력은 없었다)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전략사무국|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제국 의용군에 자원입대한 조선인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좌우합작]]이 이루어져 [[1942년]] [[7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한국광복군 부대로 흡수했다. 일본 측에는 한국광복군과 일본군의 공식의 전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던 부사령관 겸 1지대장 [[김원봉]]을 비판하였고,<ref>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6) 165 페이지</ref> 일본군 출신들을 독자적으로 영입하려던 것을 [[지청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심어주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ref>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ref name="pp81"/>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ref name="fich72"/> 그 뒤 [[김구]]와 연락한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미국]] [[국무성]]과의 접촉으로 도노반 등을 파견하여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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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
[[파일:Kimgu&Donobun 01.jpg|섬네일|300픽셀|오른쪽|[[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344379 해방후 입대해도 광복군?…건국훈장까지 받아] 노컷뉴스</ref>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 육군|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앨버트 코디 웨더마이어|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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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일본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좌우합작]]이 이루어져 [[1942년]] [[7월]] [[김원봉]]계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한국광복군 부대로 흡수했다. 일본 측에는 한국광복군과 일본군의 공식의 전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던 부사령관 겸 1지대장 [[김원봉]]을 비판하였고,<ref>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6) 165 페이지</ref> 일본군 출신들을 독자적으로 영입하려던 것을 [[지청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심어주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ref>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대위 출신은 신현준과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일제 패망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국군 대위 신현준과 중위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대대장과 2중대장을 각각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ref>{{저널 인용
|url=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7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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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은 그 실체보다 숫자에 과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년]]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으로 이들 중 해방 후인 8월 19일에 입대한 인물도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39645 엉터리 광복군 많다] [[SBS 뉴스]] 2005-03-01</ref>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백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광복군 독립유공자 5백60명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해방 직전 혹은 직후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승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ref>[http://www.vop.co.kr/A00000026115.html 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 광복군 1지대원 김득명씨 “가짜 광복군 많다” 폭로] [[민중의 소리]] 2005-07-04 09</ref>
 
== 구성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