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59번째 줄: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ref name="pp81">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81페이지</ref><ref>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일조각, 1982) 343~345페이지</ref>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ref name="pp81"/><ref>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일조각, 1982) 344페이지</ref>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ref name="pp81"/>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82페이지</ref>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76페이지</ref>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ref name="pp81"/>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ref name="fich72"/> 그 뒤 [[김구]]와 연락한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미국]] [[국무성]]과의 접촉으로 도노반 등을 파견하여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 성장과 활동 ==
줄 67 ⟶ 69: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본제국|일제]]와 [[나치 독일|독일]]에 [[선전포고]](이 선전 포고는 일본 측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효력은 없었다)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전략사무국|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ref name="pp81"/>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ref name="fich72"/> 그 뒤 [[김구]]와 연락한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의 [[미국]] [[국무성]]과의 접촉으로 도노반 등을 파견하여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 국내정진작전과 국군자격 귀국의 좌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