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생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므로 수정함.
태그: m 모바일 웹
31번째 줄:
[[193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일본 육사]]에 진학하기 위해 도쿄로 갔지만 방향을 바꿔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에 진학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하였다. 일본 유일의 관립 학교인 [[도쿄 음악학교]]는 당시 음악 엘리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음악학교 진학을 너무도 불쾌하게 여긴 아버지가 학비 관련 지원을 끊자 현인은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NHK]] 합창단의 모집 광고를 본 현인은 오디션에 응시하여 단원이 되었다. 유학 시절 왕족 출신의 [[아사카 기요코|마리코]]와 연애하기도 하였으나 곧 귀국하여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하였다.
 
[[1939년]]에 '''고토 진'''(後藤 仁)으로 창씨 개명하였는데, 훗날 그의 예명이 된 '''현인'''(玄仁)은 고토라는 성만 현으로 바꾼 것이다. [[1942년]]에 [[도쿄 음악학교]]를 나오고 귀국하여 성보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일하였다. [[1943년]]에 동료들과 악극단을 구성해 [[톈진 시|톈진]]으로 가서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랐으며, [[베이징 시|베이징]], [[항저우 시|항저우]] 등지로 일본군 위문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한 뒤에 베이징 비밀 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현인은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들어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경음악단을 조직하였다. [[1947년]] 29세에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밤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해 [[박시춘]]이 작사하고 [[유호 (작가)|유호]]가 작사한 '신라의 달밤'을 발매하여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 인기 덕에 현인은 [[1949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 영화인 '푸른 언덕'에 주인공으로 선정되고,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무렵 현인은 세계를 풍미하던 '베사메 무쵸'나 '꿈속의 사랑'과 같은 곡을 번안해 노래하여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52년]]에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의 히트곡 '장미 빛 인생' 등을 불러 한국에 샹송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현인은 이후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잇달아 히트시켜 [[1950년대]]에 가장 빛나는 대중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현인의 노래는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하고,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1950년대]] 초 현인은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였다. [[1950년]] [[4월 1일]] 동아 극장에서 은방울악극단의 '은방울쇼'에 당대 스타들과 함께 연예 활동을 하였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군부대 위문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편, [[1951년]] [[3월 30일]] 부민관에서 '손목인과 그 악단'의 공연에 특별 출연하였으며 [[1951년]] [[4월 24일]] 동아 극장에서 '현인과 그 악단'을 만들어 '멍기의 노래'로 무대에 올랐다. [[1952년]] [[6월 1일]]에 신청년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특별시|서울]]로 돌아간 현인은 [[박시춘]]의 은방울쇼단에 합류하면서 다시 큰 인기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