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남원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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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청주 김씨|청주]] 출신으로, 원보 [[김긍률]]의 딸이다<ref>《고려사》권88〈열전〉권1 - 청주남원부인 김씨</ref>. [[본관]]은 [[청주 김씨|청주]]이며, [[고려 혜종|혜종]]의 제3비인 [[청주원부인]]과는 자매간이다<ref name="hankook">{{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2_0013437&isEQ=true&kristalSearchArea=B |제목=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청주남원부인〉항목] |확인날짜=2012-06-2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11164145/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2_0013437&isEQ=true&kristalSearchArea=B |보존날짜=2016-03-11 |깨진링크=예 }}</ref>.
 
원래 청주 지역은 그 기질이 드세 반고려적 성향을 나타내며 잦은 반란을 시도하였고<ref name="hankook" />,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에 충성을 바치게 된 곳이다. 혜종은 이러한 청주 지역의 힘을 규합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청주 지역 호족의 딸을 자신의 왕비로 들이게 되었다<ref> {{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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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4-11-18
|id= {{ISBN|89-01-04753-5}}
}} </ref>. 한편 혜종 대에 있었던 왕규와 정종, [[고려 광종|광종]] 등의 사이에서 벌어진 왕권 다툼을 두고 혜종이 이러한 싸움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처제가 되는 청주남원부인을 정종에게 시집보냈다는 견해<ref>{{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2_0013438&isEQ=true&kristalSearchArea=B |제목=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청주원부인〉항목] |확인날짜=2012-06-2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808145828/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2_0013438 |보존날짜=2014-08-08 |깨진링크=예 }}</ref>와, 광종에게 자신의 딸([[경화궁부인]])을 왕비로 들인 혜종이 정종에게도 일종의 배려 차원에서 자신의 처제를 시집보냈다는 견해도 있다<ref name="hankook" />.
 
《[[고려사]]》의 〈열전〉이나 〈세가〉에는 청주남원부인의 자세한 생애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녀의 생몰년이나 능지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소생은 없었으며, [[호 (이름)|호]]는 '''청주남원부인'''(淸州南院夫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