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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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기독교}}
'''
p. 411"</ref>)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로, [[신약성경]]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파울로스
== 개요 ==
{{기독교}}
== 이름 ==
=== 한국어 성서 번역본의 음역 차이 ===
1900년 완역한 [[신약성경]] 전서 음역을 따른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은 ‘바울’,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은 ‘바오로’라고 한다. [[성공회]]는
이와같이
== 생애 ==
소아시아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ref name="act22:3">[[사도행전]] 22:3</ref>.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ref name="pts" />,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다고 추측하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바울의 선교 활동 중에 유대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ref>그들이 채찍질을 하려고 바울을 눕혔을 때에, 바울은 거기에 서 있는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유죄판결도 내리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백부장이 이 말을 듣고, 천부장에게로 가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사람은 로마 시민입니다" 하고 알렸다. 그러자 천부장이 바울에게로 와서 "내게 말하시오. 당신이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물었다. 바울이 그렇다고 대답하니,천부장은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였다.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입니다" 하고 말하였다.그러자 바울을 신문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 천부장도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일로 두려워하였다.(사도행전 22:25-29/표준새번역)</ref> 여하튼
=== 학식 ===
{{인용문|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사도행전]]|17:28, [[공동번역성서]]<ref>주전 600년경 에피메니데스 시인이 쓴 '크레타'와 아라투스 시인(주전 315-214)의 시를 인용. 《사도행전》2/김회권 지음/복있는 사람P.183</ref><ref>[http://www.holybible.or.kr/B_COGNEW/cgi/biblesrch.php?VR=COGNEW&QR=%BF%A9%B7%AF%BA%D0%C0%C7+%BD%C3%C0%CE&OD=|공동번역성서 사도행전 17:27]</ref>}}
사도행전에는
{{인용문|몇몇 사람이 바울로 편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레오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하여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사도행전]]|17:34, [[공동번역성서]]}}
=== 주요 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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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식]]의 연대기 구성<ref>[[성공회]] [[사제]] 신약성서학자.</ref> 의 연대기<ref>{{서적 인용|제목=앞의 책|저자=[[박태식]]|쪽=p.3}}</ref> ====
* 기원후 [[5년]]경 출생
* 32-[[33년]]경 [[스테파노]] [[부제 (기독교)|부제]] 순교,
* 33년-[[39년]]경 [[요르단강]] 동부 거주
* [[39년]]경 [[다마스쿠스]] 탈출, [[예루살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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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
[[파일:Caravaggio-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jpg|섬네일|200px|오른쪽|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 선교활동 ===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용문|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사도행전]]|15:36-39, [[공동번역성서]]}}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파록쉬스모스({{llang|el|παροξυσμὸς|paroxusmos}})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말이다.
===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
[[파일:Greco, El - Sts Peter and Paul.jpg|섬네일|200px|베드로와
==== 사도권 둘러 싼 갈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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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apostle)는 '{{llang|el|απόστολος}}'의 음역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ref>{{서적 인용|저자=하워드 클락 키이|제목=앞의 책|쪽=p.349}}</ref>
[[사도]] 자격 가운데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
[[김득중 (1941년)|김득중]]<ref>신약성서학자.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ref> 은 고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토라|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 단절을 주장하며, 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 (기독교)|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인용문|그리고 십사 년 뒤에 나는 디도를 데리고 [[바르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따로 만나 내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짜 신도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몰래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실상 디도가 할례를 강요당할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를 보존하려고 우리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므로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었든 간에 나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도 나에게 어떤 새로운 제언을 한 일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마치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직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같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나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사도 요한|요한]]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은혜를 인정하고,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은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한 가지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전부터 열심히 해오던 일이었습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10, [[공동번역성서]]}}
== 육체노동자
[[사도행전]]에 의하면
{{인용문|그 뒤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고린토로 왔는데 거기에서 그는 본도 출신인 아퀼라라는 유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퀼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자기 아내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 온 사람이었다. 바울로가 그들을 찾아 갔는데 마침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사도행전]]| 18:1-3/[[공동번역성서]]}}
[[정승우]]에 의하면 한글[[성서]]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로 번역한 [[헬라어]] 스케노포이오스는 [[가죽]]을 가공하는 모든 [[직업]]을 뜻하기도 한다. 즉,
==
바울 후 기독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ref>{{서적 인용|저자=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제목=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편집자=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출판사=대한기독교서회|연도=2004|쪽=p. 351}}</ref>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훈련된 [[레기온]]([[신약성서]]의 [[마르코복음서]]에서는 군대로 번역)의 정복전쟁으로 [[지중해]] 다른 민족들과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해간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제국은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캐롤라인 오시에크|제목=신약의 사회적 상황|편집자=김경진 옮김|출판사=기독교문서선교회|연도=1996|쪽=p. 76}}</ref> 이를 그리스-로마(그레코-로만)문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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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12:1-5), [[공동번역성서]].}}
==
===
==== 예수상 ====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물론
==== 교회관 ====
=== 신약성서의 해석 ===
135번째 줄:
=== 구원론 ===
이방기독교 지도자
=== 성례전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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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만찬]]은 [[사회통합]]을 위한 성례전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성만찬때마다 부유층 교인들이 빈곤층 교인들과 밥상을 나누지 않는 모습을 "주님이신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성 목요일]])에 성만찬을 제정하시어 그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부유한 교인들이 가난한 교인들과 성만찬을 나누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가난한 교우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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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의 작성자 문제 ===
신약성서에서 실제
#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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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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