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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자스카잔자키스'''([[그리스어]]: 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1883년]] [[2월 18일]] ~ [[1957년]] [[10월 26일]])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동 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형적 특성과 터키 지배하의 기독교인 박해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 민족주의 성향의 글을 썼으며, 나중에는 [[앙리 베르그송|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소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시적인 문체의 난해한 작품을 남겼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 생애와 문학세계 ==
[[파일:Kazantzakisgrave.jpg|오른쪽|섬네일|200px|[[이라클리오]]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1883년 [[오스만 제국]] 치하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자스는카잔자키스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그는 크리티 섬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1902년 [[아테네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재학 도중 수필 《병든 시대》와 소설 《뱀과 백합》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희곡도 쓰기도 했다. 1907년에는 [[파리 (도시)|파리]]로 유학했으며 베르그송과 니체 [[철학]]을 공부했다. 1911년 그리스로 돌아와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결혼했으며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베니젤로스]] 총리 비서실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17년 고향 크리티 섬에 돌아와 후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알렉시스 조르바의의이조르바의의 실제 요르고스 조르바와인물인조르바와 함스 갈탄 채굴 및 벌목 사업을 했었으며, 이것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하였다.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공공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 평화 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선거에 패배하여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갔으며 그 후 유럽을 여행했다.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을 때까지 ===
1926년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이혼했으며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어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일시적으로 민족주의 쪽으로 돌아서기도 했으며 1944년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하자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때 12월 사태로 알려진 내전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 사회주의 운동과 결혼 ====
이후 정치로 다시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리스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소풀리스 연립정부의 정무 장관으로 임명된다. 1946년 정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해, 그리스 작가 협회는 카잔자스와카잔자키와 [[앙겔로스 시겔리아노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 동반자였던 엘레니 사미우와 결혼했다.
==== 교회의 박해 ====
[[1953년]] 소설 《[[미할리스 대장]]》이 발간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맹렬히 카잔자스를카잔자키를 비난했으며 이듬해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후의 유혹]]》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카잔차자의 소설은카잔차의킷소설은 그리스에서 일시적으로 출간되지 않기도 했다. 카잔차키자는 교부카잔차키자교킷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1955년에는 그리스 왕실의 도움으로 《최후의 유혹》이 그리스에서 발간되었다.
 
====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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