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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였으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고아들에게 국화빵(풀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끔 자립을 지원 하였으나,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쉬는 날이 많아 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 업적 증명의 경우, 가족이 없거나, 비밀 작전, 소규모 전투에 참여한 경우 전투로 인한 총상, 동료의 증언, 당시 기사에 이름이 언급 되었거나 다른 개관적인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면,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아 업적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오히려 범죄자로 오해받기도 하여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척된 부와 인적 네트워크 등을 통해 오히려 [[기득권]]층에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555068&cp=nv 일제 강제동원 공탁금-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6천억이 주식… 친일파 등 전범기업에 투자해 치부]{{깨진 링크|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555068&cp=nv }}</ref><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90 박근혜 정부의 ‘역사전쟁’이 시작됐다]</ref>
 
박희광의 업적은 정부와 학계,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 독립신문 등의 신문기사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그의 행적이 증명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3월1일 삼일절 행사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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