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하 (189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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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하'''(1892∼1960洪在廈·1898∼1960)는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던 독립운동가. 20189년2019년 8.15를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홍재하일제 선생은치하에서 '숨은독립운동을 애국자'로하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불린다임시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댄 인물이다. 1920년 1월 프랑스 최초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 조직에 참여해 그해 7월부터 제2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특히 동료 한인들과 함께 1차 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내는 등 자금책 역할을 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임시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댄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 공적의 전체 내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1&aid=0011016428
|제목=일제 무단통치 항거 이봉구선생 등 178명, 독립유공자 포상(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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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일제에 맞서다 프랑스에 건너온 뒤에도 조국의 저항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돕던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廈·1898∼1960)의홍재하의 구체적인 삶의 궤적이 재불 동포들의 노력으로 사후 60년 만에 확인됐다.
 
홍재하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북해, 영국을 거쳐 1919년 프랑스로 건너와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의 2대 회장을 지냈다.
홍재하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 임시정부 인사들을 돕고 국내에 독립 자금을 댄 인물로, 지금까지도 그 공적의 전체 내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자금을 대고 3·1운동의 정신을 프랑스에서 기리는 활동을 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존재와 활약상은 최근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와 러시아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들어온 홍재하의 2남 3녀 중 차남 장자크 홍 푸안(76)씨가 브르타뉴 지방 생브리외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다가 장자크씨와 우연히 친분을 맺게 된 재불동포 부부와 국내외 역사학자들의 도움이 있었고, 연합뉴스가 2018년 10월 장자크씨의 사연을 처음 보도하면서 홍재하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국내에서도 본격화했다.
그는 부친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한 서신 등 희귀문서들을 누나로부터 2006년 물려받아 보관해오다 최근 한인 부부의 도움으로 이 자료의 정리를 시작했다.
 
장자크최근 씨가밝혀진 보관해온 기록들에사료들에 따르면, 홍재하는 1898년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다.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 현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홍재하 등 한인들은 1차대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에든버러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는 1919년 전후로 영국 에든버러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노력으로 다른 한인 34명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왔다. 유품에는 그가 러시아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기록과 황기환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다.
 
이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는 황기환 서기장을 영국에 급파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묶인 동맹국이었는데 임시정부는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송환될 뻔한 이들 중 홍재하 등 35인을 1919년 프랑스로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홍재하는 이후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결성에 참여, 이 단체 2대 회장을 지냈다.
 
홍재하는 이후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 결성을 주도해 이 단체의 2대 회장을 지낸다. 프랑스에서 동료 한인들과 함께 1차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내는 등 자금책 역할도 했다.
재불 동포 1세대인 홍재하 등은 1차대전 격전지 마른에서 전후복구를 하며 번 돈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에 보탰고, 1920년에는 프랑스에서 3·1 운동 1주년 기념식도 열었다.
 
작년 말에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돈을 모아 보내준 것에 대해 홍재하에게 감사를 표하는 친필편지가 장자크 씨가 보관 중이던 홍재하의 유품에서 발견된 바 있다.
여기까지는 학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들과 그 후손이 2차대전 종전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또 이 유품에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사실을 알리는 '독립신문'의 호외본이 최초로 실물로 확인되는 등 역사학계가 주목할 만한 자료도 다수 발견됐다.
그러던 것이 재불 동포 부부 김성영(렌 경영대 교수), 송은혜(렌2대 강사)씨가 장자크 씨를 한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되면서 베일에 싸여있던 홍재하의 삶의 궤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시작됐다.
 
차남 장자크 씨는 최근 부친이 남긴 각종 서신과 임시정부 자료 등 독립운동 관련 유품 일체를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
장자크 씨에 따르면, 홍재하는 1920년대 파리의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를 거쳐 프랑스인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번 돈을 계속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다.
 
파리에서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 등으로 일하며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2남 3녀를 둔 홍재하는 해방만 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을 간직했지만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랑을 맞게 된다. 고국의 전쟁구호 활동까지 돕던 그는 전란이 지나간 뒤에도 고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1960년 암으로 타계했다.
해방 후 처음 설치된 주불 대한민국 공사관 문서의 체류목적을 적는 난에 그는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고 적었다. '국속'을 '國束'으로 읽는다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것에 복수하고 인류 평등에 공헌하고자 프랑스로 건너왔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근교 소도시 콜롱브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ref>{{저널 인용
그러나 오매불망 고국행을 그리던 그는 프랑스와 한국이 해방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고, 고국이 다시 전쟁에 휩싸이자 비탄에 빠져 말을 거의 잃었다고 그의 아들은 증언했다.
 
이후 홍재하는 마음을 다잡고 전쟁 구호물자 조달에 매달렸고, 휴전 뒤엔 귀국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60년 암으로 타계했다. 마지막까지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근교에 묻혀 있다.
 
홍재하는 사후 60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과 관련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다.
 
장자크 씨는 부친의 유품인 각종 서신과 기록들의 뜻을 풀어보려고 한국 대사관에도 접촉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면서 주위에 아는 한인도 없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0433433
|제목='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프랑스 동포들이 찾아냈다
|출판사 =연합뉴스
|날짜=2018.10.30}}</ref>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10934073
|제목=재불 독립운동가 홍재하, 사후 60년만에 공적 인정
|출판사 =연합뉴스
|날짜=2019.07.05}}</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