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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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저와 다른 여자 한 명은 모포를 들고 산이 있는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웅덩이가 있었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 몇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지고 있던 총을 옆에 놓고 우리에게 덤벼들었어요. 일을 끝낸 후 저는 아랫배가 너무 아파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강덕경(1929~1997) 할머니의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18페이지</ref>}}
 
 
{{인용문|… 제가 배속된 곳은 최전선인 만다레였습니다. 위안소 건물은 10명가량의 군인들이 와서 지었는데, 가마니로 칸막이를 해놓아서 키가 큰 사람은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방안에는 이불과 베개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위안소가 세 군데 있었고, 위안부는 모두 조선 여자들이더군요. 위안소에서는 아침 9시부터 일(?)을 했는데, 8시부터 일을 시작할 때도 있었습니다. 요금은 사병 1원50전, 하사관 2원, 대위, 중위, 소위는 2원50전, 대령, 중령, 소령 등 영관급은 3원이었습니다. 
 
한 번 하는데 1시간씩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1시간 동안 여러 명의 군인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군인들이 "야! 빨리 하고 나와, 빨리!"라고 재촉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일을 치르곤 했습니다. 
 
사병들은 귀대시간이 있기 때문에 빨리빨리 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장교들에게는 시간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1시, 2시까지  위안소에 있다 가곤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30~70명씩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외출일이 부대마다 달랐기 때문에 우리들은 매일같이 교대해 오는 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조선인 군인, 군속들도 위안소에 오곤 하였습니다. 조선인 군속들은 '포로감시원'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같은 민족인 우리들이 불쌍하다고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방 소독을 했고, 군의관이 와 검진을 했습니다. 임질 같은 병에 걸리면 입원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위안소의 자기 방에 누워 낫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문옥수(1924~1996) 할머니의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24페이지</ref>}}
 
영국군 소령 조지 메일러-호와트는 어느 일본군 위안소에서 빠져나온 '겁에 질린 조선 소녀들 무리'를 발견한 상황을 회고록에 적기도 했다.<ref>[https://www.yna.co.kr/view/AKR20160216210400004 - '파란 눈' 연합군이 목격한 일본군 위안부는 어땠을까]</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