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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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m 모바일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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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
=== 취업 사기 ===
{{인용문|어느 날 공장에 갈 직공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단순히 공장에 일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어린 시골 처녀들이었습니다. 저도 공장에 돈 벌러 간다고 생각하니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저는 깨끗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갔습니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함락되던 1942년 4월이었습니다. 함흥역까지는 조선인이 인솔했어요. 많은 여자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고, 입구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더군요. 게다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기차 창문은 모두 검정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를 실은 트럭은 캄캄한 밤중이 돼서야 어느 육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그곳이 '히노마루' 부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양옥 안의 조그마한 방이었는데, 안에는 좁게 칸막이를 해놨고, 모포 몇 장이 놓인 나무침대가 있었습니다. 헌병이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황금주(1927~2013) 할머니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30~634페이지</ref>}}
=== 가난 & 가족의 빚 청산 ===
가난한 집안 환경 또는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하는 케이스도 존재하였다. [[1942년]] [[5월]] 초순 [[일본]]이 새로 정복한 [[동남아시아]]에서의 위안 서비스를 위해 한인 위안부를 모집하려고 [[일본인]] 주선인들이 한국에 도착했다.<ref name="mojip473">강만길, 《한국민족운동사론》 (서해문집, 2008) 473페이지</ref> 이들 주선인들의 조건은 '많은 돈, 가족의 부채를 없이 하는 기회, 쉬운 일<ref name="mojip473"/>' 등이었다. 이 조건에 현혹되어 많은 여성들은 해외 모집에 응했고 몇백원의 착수금을 받았다.<ref name="mojip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