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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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깨끗한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갔습니다. 이때가 싱가포르가 함락되던 1942년 4월이었습니다. 함흥역까지는 조선인이 인솔했어요. 많은 여자들이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고, 입구에는 헌병들이 지키고 있더군요. 게다가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기차 창문은 모두 검정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를 실은 트럭은 캄캄한 밤중이 돼서야 어느 육군부대에 도착했습니다. 나중에 그곳이 '히노마루' 부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양옥 안의 조그마한 방이었는데, 안에는 좁게 칸막이를 해놨고, 모포 몇 장이 놓인 나무침대가 있었습니다. 헌병이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황금주(1927~2013) 할머니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30~634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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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위안부들은 계약기간이 존재하는 계약직 위안부들이었다. 위안부들의 계약 기간은 착수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6개월 내지 1년<ref name="mojip473"/> 이상 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위안부 여성들은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한 채로 강제적인 성노예 활동을 해 왔다.
{{인용문|…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20여 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의 성기조차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을 상대할 때마다 '똥이라도 먹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서 세탁과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하곤 했습니다. 생리 때에는 생리대가 있는 데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을 훔쳐다 썼는데, 들키면 매를 맞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밥도 주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어떤 여자는 장교와 심한 싸움을 했는데, 매를 맞으면서도 반항하다가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도 계속 반항하니까 그 장교는 벌거벗은 그 여자의 음부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이런 끔찍하고 잔혹한 일들을 일본인들이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황금주(1927~2013) 할머니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30~634페이지</ref>}}
 
 
{{인용문|…천막 속에는 1인용 목침대가 있어 여기에서 군인들을 상대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국부의 통증이 너무 심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하루에'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후 이곳에서 약 4개월 동안 군인들을 상대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온 '고바야시'만 상대했었는데, 사흘 뒤부터는 다른 군인들도 받게 됐습니다. 군인들은 매일 찾아왔고, 평일에는 4~5명 정도, 주말에는 10명 이상을 상대했지요. 주말만 되면 마치 사형집행일 같이 생각됐습니다. 
 
어느 날 밤 저와 다른 여자 한 명은 모포를 들고 산이 있는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웅덩이가 있었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 몇 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지고 있던 총을 옆에 놓고 우리에게 덤벼들었어요. 일을 끝낸 후 저는 아랫배가 너무 아파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강덕경(1929~1997) 할머니의 증언<ref>박도, 《일제강점기》(눈빛출판사, 2010) 618페이지</ref>}}
 
 
{{인용문|… 제가 배속된 곳은 최전선인 만다레였습니다. 위안소 건물은 10명가량의 군인들이 와서 지었는데, 가마니로 칸막이를 해놓아서 키가 큰 사람은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방안에는 이불과 베개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위안소가 세 군데 있었고, 위안부는 모두 조선 여자들이더군요. 위안소에서는 아침 9시부터 일(?)을 했는데, 8시부터 일을 시작할 때도 있었습니다. 요금은 사병 1원50전, 하사관 2원, 대위, 중위, 소위는 2원50전, 대령, 중령, 소령 등 영관급은 3원이었습니다. 
 
한 번 하는데 1시간씩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1시간 동안 여러 명의 군인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군인들이 "야! 빨리 하고 나와, 빨리!"라고 재촉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일을 치르곤 했습니다. 
 
사병들은 귀대시간이 있기 때문에 빨리빨리 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장교들에게는 시간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1시, 2시까지  위안소에 있다 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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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과 문제 ==
=== 현지인의 자발적 협조 ===
{{Main본문|친일파}}
한국인 여성 위안부를 데려가거나 공출해가는 데 한국인들의 협조도 존재하였다. [[2001년]]의 한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군위안부를 동원한 사람은 군인/군속 20.6%, 순사/경찰관 20.6%, 동네 이장/구장(구청장) 7.8%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한국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 일본인 모집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ref name="jabalm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