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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는 17세가 되던 1971년에 정규 1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다.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정통 트로트 《물새 한마리》(이용일 작사/ 고봉산 작곡) 가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성인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가요계를 이끌게 되었다. 1972년에 가수 겸 작곡가였던 [[고봉산]]과 신민요 《잘했군 잘했어》(원작: 이고범/ 개작: [[반야월]]/ 작곡: 고봉산)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18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톱 가수로 성장했다. 그 해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만들어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 신민요 《영암 아리랑》(작사: 백암/ 작곡: 고봉산)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 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성 가수로 발돋움 하였다.
 
공식 데뷔 이후 한창 상승세를 타던 하춘화는 1970년 대에 접어들며 신민요 이외에도 정통트로트 《알고 계세요》(작사: 정두수/ 작곡: [[박춘석]]), 팝 스타일이 돋보이는 곡 《숙녀 초년생》(작사: 이희복/ 작곡: [[박춘석]]), 빠른 템포의 리듬의 곡 《난생 처음》(작사: 고향/ 작곡: 남국인), 《우리 사이》(작사: [[박춘석]]/ 작곡: [[박춘석]]) 등 여러 곡들을 히트시켜 [[MBC]] 10대 가수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경지까지 올라가 1970년 대의 인기가수로 등극한다. 1974년부터 자신만의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하였으며 그 해에 영화 《숙녀 초년생》에서 [[남진 (배우가수)|남진]]과 함께 주연으로 열연하여 영화계에도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7년 11월 11일에 [[이리역]]에서 공연 도중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열차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 약 59명이 사망하고 115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 중에 하춘화와 [[이주일]]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에 지장을 받기도 했다. 1979년 3월 27일에 하춘화는 [[경남대학교|경남대]]에서의 학업과 결혼 준비로 인하여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 선언 2년 만인 1981년에 가수로 복직하였는데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수로 복직한 뒤에는 슬픈 감정과 느린 템포의 곡 《우리 사랑 가슴으로》(작사: 이성만/ 작곡: 이범희)가 히트하였고 1983년에 자신의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로인해 대중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였던 하춘화는 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시 남측 여자가수 대표로 3박 4일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