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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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1988년, 일본 진출, “모나리자”와 “서울 서울 서울” ===
조용필은 락 음악과 발라드 음악, 트로트 음악 또는 〈강원도 아리랑〉처럼 한국 [[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 내며 다양한 연령층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용필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오빠부대]]로 불리는 젊은 여성 팬층을 이끌고 다니기도 했으며 조용필 등장 이전에 대한민국의 최고 인기 가수로 호평을 받던 [[남진 (가수)|남진]]과 [[나훈아]]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1985년]] 조폭 출신 김 모씨로부터 폭행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경찰은 조씨에 대한 폭행사건에대해 수사를 펼치기로 했으며 보디가드를 5명으로 늘리기로 하였다. 홀로 대한민국 가요사의 한 획을 긋기 시작하던 조용필은 [[1986년]]에 일본에 진출하여 발매한 앨범 〈추억의 미아 1〉이 100만장이상 판매하는 대성과를 거두어 그 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장르를 섭렵한 가수로 통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용필을 엔카의 황제로 부른다. [[1988년]]에는 10집 음반을 발표했는데 그 음반의 수록곡 〈서울 서울 서울〉,〈모나리자〉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여러 가수와 경쟁을 하였다. 이 중 〈서울 서울 서울〉은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 때 방송에서 전파되면서 부터 인기를 얻었는데 조용필은 당시 인터뷰 때 올림픽이 끝나면 우리 사회가 우울해 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 1993년~1994년, 교통사고 그리고 음반 판매량 1천만장 돌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