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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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27-28쪽</ref>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칸국|중가르]] 부족의 칸인 [[가르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교|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ref>김후, 활이 바꾼 세계사, 가람기획, 2002년, {{ISBN|89-8435-114-8}}, 327-328쪽</ref>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족|만주인]]이 아닌 [[몽골족|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가르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파일:40 years old Kangxi.jpg|섬네일|200px200픽셀|40대의 강희제]]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ref>중국사학회(2005), 중국역사박물관 10, 32쪽</ref>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ref>둥예쥔, 허유영 역, 강희원전-수신제가, 시아출판사, 2004년, {{ISBN|89-8144-146-4}}, 221-22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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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남러시아에서 살던 [[투르쿠트]] 족에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가르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ref name="중국사학회33"/>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ref>웨난, 심규호/유소영 역, 《열하의 피서산장 1》, 일빛, 2005년, {{ISBN|89-5645-079-X}}, 156쪽</ref>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 족위구르족|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ref>조영록 외, 국학자료원, 동양의 역사와 문화, 1998년, {{ISBN|89-8206-273-4}}, 150쪽 - 건륭제는 세로 편입된 이 지역을 신강(新疆)으로 명명했다.</ref>
 
===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