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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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ngbeolno gate.jpg|right|섬네일|잉벌노 문: 시흥군의 [[고구려]] 때 이름 "잉벌노"에서 따온 명칭이다. 서울 금천구 소재.]]
오늘날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관악구]], [[동작구]] 일부, [[금천구]], [[광명시]] 및 [[안양시]] 일부 지역은 [[고구려]] 때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던 것<ref>오늘날의 시흥시 북부 지역은 당시에 매소홀현(買召忽縣, 현 [[인천광역시]])에 속했고, 오늘날의 시흥시 남부 지역은 당시에 장항구현(獐項口縣, 현 [[안산시]])에 속했다.</ref>을 [[신라]] [[신라 경덕왕|경덕왕]] 때 '''곡양'''(穀壤)<ref>곡양이라는 지명으로 이 지역이 일찍부터 수전 농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적 인용 |저자=최완기 |제목=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초판발행일자날짜=1997-3-10 |판=초판 |출판사=(주)교학사 |출판위치=서울 |쪽=408 }}</ref>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 속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금주'''(衿州, '衿'을 '黔'이라고 쓴 기록도 있다)라고 고쳤고, [[고려 성종|성종]]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하였는데 [[고려 목종|목종]]이 폐지하였다. [[고려 현종|현종]] 9년(1017년)에 수주(樹州)에 예속되었고, [[고려 명종|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조선 태종|태종]] 14년(1413년)에 과천(오늘날의 [[동작구]], [[서초구]],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지역)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오늘날의 [[강서구 (서울특별시)|강서구]], [[양천구]] 지역)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 만에 혁파하였다. 태종 16년(1415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고, [[조선 세조|세조]] 때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서 복구하였다.<ref>《[[:zh:s: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十 衿川縣: 建置沿革 本高勾麗仍伐奴縣新羅景德王改穀壤爲栗津郡領縣高麗初改爲衿州衿一作黔成宗置團練使穆宗罷之顯宗九年屬樹州明宗始置監務本朝太宗十四年以果川來合爲衿果縣數月而罷又以陽川來合爲衿陽縣一歲而罷十六年改今名爲縣監世祖朝幷于果川未幾復舊</ref> 이후에는 금천(衿川)이라고 하였는데, 금천현은 현내면, 동면, 서면, 남면, 상북면, 하북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면에 상도리, 봉천리, 신림리, 난곡리, 문교리 등이, 상북면에 당산리, 양평리, 선유봉리, 하북면에 방학호리, 고사리 등이 속해 있었다.<ref>{{서적 인용 |저자= |제목= 여지도서(輿地圖書) |초판연도=1757~1765 |출판위치=서울 |쪽=상, 경기도 금천}}</ref> 참고로 현내면은 지금의 금천구, 상북면과 하북면은 지금의 영등포구, 동면은 지금의 관악구와 동작구 일부,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 서면은 지금의 광명시 동부에 해당한다.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이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윤 5월 1일, [[23부제]]의 실시로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에 속하였고,<ref>[[:s:고종실록 32년 5월 음력 5월 26일|《고종실록》32년 음력 5월 26일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의 개정에 관한 안건〔地方制度改正件〕〉]]</ref> 이듬해 [[13도제]]의 실시로 [[도 (행정 구역)|도]](道)가 부활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의 [[시흥시]] 남부 지역은 현재의 [[안산시]]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는 처음 장항구현(獐項口縣)현으로 명명되었다가 통일신라 시기인 757년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고, 940년에 [[안산군]](安山郡)이 되었다. 지금의 [[시흥시]] 북부 지역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남부 지역('원인천')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는 처음 미추홀(彌鄒忽)로 명명되었다가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고 통일신라 시기인 757년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된 후 율진군(栗津郡; 지금의 [[과천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구]])의 속현이 되었다. [[1105년]]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 이 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樹州)에서 분리되었다. [[고려 인종]]때에 인종 왕해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 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가 되었다가 경원부와 인주군으로 차례대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4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주군이 [[인천군]](仁川郡)으로 개명되었고, 1460년에 인천군이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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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
취락의 형성이 극히 미미했던 영등포 지역이 번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였다. 조선 피혁 주식회사, 경성 방직 회사 등이 이 지역에 설립되면서 곧이어 많은 공장들이 가동했다. 당시 영등포 지역에 공장이 집중적으로 설립된 것은 본래 이 지역이 [[한강]]과 [[안양천]]으로 둘러싸인 [[범람원]]으로서 염가로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고, 경인선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철도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ref>{{서적 인용 |저자=최완기 |제목=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초판발행일자날짜=1997-3-10 |판=초판 |출판사=(주)교학사 |출판위치=서울 |쪽=406 }}</ref>
 
== 함께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