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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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金活蘭,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 [[1899년]] [[2월 27일]] ~ [[1970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아호는 '우월'(又月)이다. [[이화학당]]의 고등부를 거쳐 [[1918년]]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다가 여자 YMCA를 독립, [[1923년]]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중앙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조직하였다.
 
[[1923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편입, [[1924년]] 학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26년]] [[9월]]에는 [[철학]][[석사]]를 받았으며,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사와 교감, 부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 중 "무지와 구습의 타파"를 이유로 공개 단발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1931년]] [[10월]]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1936년]] 전후로 일본의 강경노선에 따라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그는 강연, 논술활동을 하는 한편 [[1941년]] [[창씨개명]] 후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칼럼, 강연, [[학도병]] 독려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1년 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 1942년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는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여러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뒷일은 우리가’,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등의 글을 발표하며 조선 민중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활발하게 종용하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서슴지 않았다.<ref>{{저널 인용
|url=https://www.vop.co.kr/A00001423290.html
|제목=[권종현의 교육희망] 사학법인이 징계권을 남용해도 어쩔 수 없다는 교육부?
|출판사 =민중의소리
|날짜=2019-07-24}}</ref>
 
광복 이후에는 [[반탁운동]]에 참여한 뒤 48년 [[장면]], [[조병옥]]과 함께 파리 UN 총회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받고 귀국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전시 내각에 참여했다가 정식 [[공보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았으며, 언론인으로는 영자(英字)신문사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