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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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미술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되는데 1890년 모리스 드니의 "회화란 전쟁터의 말이나 나부이기 이전에 질서를 가진 색채로 덮여진 평면이다"라고 말은 회화가 지금까지 사물의 묘사나 설화적인 표현의 종지부를 찍는 선언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포비슴]]에서는 이미 [[폴 고갱|고갱]]이 주장해 온 색채의 해방을 추진했고, [[퀴비슴]]은 사실적인 사물을 분해하여 화면에 재구성하였다. 또 [[미래파]]는 현대의 급속한 변혁에 일치하는 스피드 감각을 표현하는 관계로 일종의 시각언어를 창조하였다.
 
1915년 퀴비슴의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는[[카지미르 쉬프레마티슴을말레비치|말레비치]]는 [[쉬프레마티슴]]을 주창하며 순수한 형태에 의한 화면 구성을 목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모든 시각적인 대상을 버리고 이것을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는 추상적 도형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凝縮)시킨 형태로써 화면에다 배치하였다. 추상미술이 현상의 추출 작업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쉬프레마티슴의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미술의 가치 전환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 영향력은 크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한 운동이지만 그 이념은 널리 유럽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저류가 되었다. 특히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바우하우스에[[바우하우스]]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본격적인 추상의 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로베르 들로네,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카시미르 말레비치]], [[블라디미르 타틀린]] 등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전 중에는 [[데 스틸]]의 멤버였던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판 두스뷔르흐, [[다다이즘|다다]] 그룹의 [[장 아르프]] 등이 추상미술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쉬프레마티슴과[[쉬프레마티슴]]과 함께 타틀린, 로드첸코, 가보, 페브스너 등은 혁명 전후 러시아에서 구성주의를[[러시아 구성주의|구성주의]]를 전개하고 추친하였다. 퀴비슴이 시사한 추상적 조형과 미래파가 촉발한 기계주의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고, 더욱 혁명 전후 민중의 입장도 반영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건축·공예·무대·디자인 등 광범위에 걸친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모스크바에서 구성주의의 대총합 전시회가 열렸던 1920년을 최종의 피크로, 그 해에 페브스너와 가보의 형제가 이 그룹을 이탈하고, 이윽고 소비에트 문화 지도이념의 전환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형식주의라 비판을 받아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념은 유럽에 전파되어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한 칸딘스키도[[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도 1921년까지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5년 퀴비슴의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는 쉬프레마티슴을 주창하며 순수한 형태에 의한 화면 구성을 목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모든 시각적인 대상을 버리고 이것을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는 추상적 도형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凝縮)시킨 형태로써 화면에다 배치하였다. 추상미술이 현상의 추출 작업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쉬프레마티슴의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미술의 가치 전환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 영향력은 크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한 운동이지만 그 이념은 널리 유럽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저류가 되었다. 특히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바우하우스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1917년에 테오 반 도스부르크는 라이덴을[[레이던|레이덴]]을 중심으로 [[신조형주의|스틸이라는스틸]]이라는 그룹을 집결하였다. 기하학적인 선과 순수한 색채와의 몰개성적(沒個性的)인 관계에 기초를 둔 이 운동의 미학은 회화에 몬드리안과[[피트 몬드리안|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 조각에는 반톤게를로, 건축에는 아우드, 실내장식과 가구에 리트펠드 등 이들이 각기의 분야에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지향하는 총합(總合)은 너무나 유토피아적 성격인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그 이념은 오히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쉬프레마티슴과 함께 타틀린, 로드첸코, 가보, 페브스너 등은 혁명 전후 러시아에서 구성주의를 전개하고 추친하였다. 퀴비슴이 시사한 추상적 조형과 미래파가 촉발한 기계주의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고, 더욱 혁명 전후 민중의 입장도 반영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건축·공예·무대·디자인 등 광범위에 걸친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모스크바에서 구성주의의 대총합 전시회가 열렸던 1920년을 최종의 피크로, 그 해에 페브스너와 가보의 형제가 이 그룹을 이탈하고, 이윽고 소비에트 문화 지도이념의 전환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형식주의라 비판을 받아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념은 유럽에 전파되어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한 칸딘스키도 1921년까지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의그로피우스]]의 입안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독일에서 국립 종합 조형학교인 [[바우하우스]]가 창립되었다. 바우하우스에는 건축을 바탕으로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공방(工房)을 기본으로 독특한 연구 교육의 조직을 갖추어, 한 공방에서 형태와 실기의 연구지도가 일시에 진행되었다. 공방에는 벽화, 글라스화·판화·제도(製陶)·금속·직물 등이 있었고, 각 분야에는 [[바실리 칸딘스키|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마르크스, 모홀리 나기, 무헤 등 전위 미술가가 형태의 연구지도를 담당하였다. 예술의 자유에 대한 나치스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하게 되어, 바우하우스도 사학교(私學校)로 격하되고 베를린으로 옮겨졌으나 이윽고 폐쇄당해 버렸다. 그러나 그 이념은 현대미술의 여러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17년에 테오 반 도스부르크는 라이덴을 중심으로 데 스틸이라는 그룹을 집결하였다. 기하학적인 선과 순수한 색채와의 몰개성적(沒個性的)인 관계에 기초를 둔 이 운동의 미학은 회화에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 조각에는 반톤게를로, 건축에는 아우드, 실내장식과 가구에 리트펠드 등 이들이 각기의 분야에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지향하는 총합(總合)은 너무나 유토피아적 성격인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그 이념은 오히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계승되었다.
 
1919년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입안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립 종합 조형학교인 [[바우하우스]]가 창립되었다. 바우하우스에는 건축을 바탕으로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공방(工房)을 기본으로 독특한 연구 교육의 조직을 갖추어, 한 공방에서 형태와 실기의 연구지도가 일시에 진행되었다. 공방에는 벽화, 글라스화·판화·제도(製陶)·금속·직물 등이 있었고, 각 분야에는 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마르크스, 모홀리 나기, 무헤 등 전위 미술가가 형태의 연구지도를 담당하였다. 예술의 자유에 대한 나치스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하게 되어, 바우하우스도 사학교(私學校)로 격하되고 베를린으로 옮겨졌으나 이윽고 폐쇄당해 버렸다. 그러나 그 이념은 현대미술의 여러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추상 표현주의]]가 미국에서 활발한 전개를 보여 유럽에 역수입되어 [[앵포르멜]] 운동을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