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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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 [[1758년]] ~ [[1814년]]경)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혜원 신가권]]'''(申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ref>{{뉴스 인용|성1=강|이름1=명관|제목=[강명관의 심심한 책읽기]족보가 있는지?|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212112065&code=990100|날짜=2016-03-21|확인날짜=2017-10-07|뉴스=경향신문}}</ref>, 그는 [[일제 강점기]]의
== 생애 ==
신윤복은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ref>신숙주는 신윤복의 10대 방조에 해당된다. </ref>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 [[신수진]]의 7세손이었다. 그러나 신수진이 서자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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