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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묘역 ===
국립현충원 '장군 제1묘역'의 채병덕, 김백일, 신응균
국립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는 김백일의 묘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서 7년간 복무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가장 악랄하게 항일운동가를 탄압한 3대 조직 중 하나로 꼽힌다. 김백일은 광복 후 군에 들어갔고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육군 중장으로 추서됐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장군 제1묘역'에는 일본육사 49기로 일본군 포병 소좌였던 채병덕(1914~1950),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였던 김백일, 일본육사 53기로 일본 육군 소좌였던 신응균(1921~1996) 등 대표적인 친일 군인이 묻혀있다.
임정 요인 묘역에 안장된 지청천 장군의 묘지 위쪽으로는 이응준의 묘가 있다. 이응준은 2005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지목한 인사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이응준 역시 이승만 정부에서 군에 입문해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총참모장이기도 했던 채병덕은 193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해 1935년에 졸업한 후 사관후보생으로 6개월간 근무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37년 12월 4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됐다. 1940년에는 포병학교를 수료하고 해방 직전에는 포병소좌로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채병덕의 장인 백홍석도 일본육사 27기 출신으로 일본군 중좌까지 올랐다.
신응균은 1940년 일본육사 53기로 졸업한 후 육군과학학교 포병과를 수료하고 일본군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했다. 1944년 6월부터는 오키나와로 판견돼 중포 중대장으로 근무했는데, 1945년 4월 미군의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오키나와 북부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부상을 입고 산속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는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에 돌려보내준다'는 소문을 듣고 귀순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미군 군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귀국했다. 일제의 패망직전 계급은 포병소좌였다.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 간도특설대에 참여한 인물이다.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제압한다'는 모토 아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부대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7기까지 모집해 운영한 간도특설대는 총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김백일은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 등과 간도특설대의 창설요원이었다. 상위 계급에까지 오르며 간도특설대의 핵심요원으로 활동한 그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중국군으로부터 들은 8월 20일까지 작전을 수행하다 부하들을 이끌고 8월 26일 진저우(錦州)로 이동해 부대 해체식까지 참석했다.
 
간도특설대가 해체된 이후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에 머물던 김백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같은 간도특설대 요원이었던 백선엽,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장교가 됐다.
'장군 제2묘역'의 이응준, 임충식, 신태영
'장군 제2묘역'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육군 중장, 197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육군 대장, 한국전쟁 당시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육군 대장(1921~1966), 해군 창설의 주역이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손원일 해군 중장(1909~1980),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육군 중장(1891~1959), 제12대 합참의장을 역임한 심흥선 육군 대장(1925~1976) 등 6기의 무덤이 있다.
6명의 장군 중 2/3에 해당하는 4명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였다. 김종오 장군이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에 오른 인물이라 제외하면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발을 들인 군인은 6명 중 1/2인 3명이 된다.
이응준은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해방 직전까지 일본군 대좌로 있었다. 191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갑(1877~1917)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3.1혁명 직후 나중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지청천(1888~1957), 1920년대 만주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맹위를 떨친 김경천(1888~1942) 등 일본육사 동기들과 중국 망명을 모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둘이 만주로 탈출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과 달리 이응준은 끝내 일본군에 남아 해방을 맞는다.
한국군 '군번 1번'이자 1956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1920~2002)도 1942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로 있던 인물인데, 이응준의 사위다.
 
신태영 역시 일본육사 출신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까지 일본군 중좌로 있다가 이후 예비역 중좌로 해주 육군병사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징병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강연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장군 제1묘역'의 신응균은 바로 신태영의 아들이다. 부자가 함께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셈이다.
 
신태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1943. 11. 17.)에 1918년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할 때 자신의 첫 출진의 목표가 "야스쿠니 신사에 묻히는 것"이었다고 회고해 일찍이 일본화된 인물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자신의 행태가 너무 부끄러웠는지 해방 이후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를 핑계로 군에 입대했으며, 이승만 정권시절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임충식은 간도특설대의 3기로 자원입대해 준위까지 올랐다. 간도특설대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상대로 일제 패망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부대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국방부장관과 국회의원(공화당)을 지냈다.
이응준과 신태영은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돼 있고, 임충식은 당사자의 구체적인 개별 행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장군 제3묘역'의 정일권과 이종찬
정일권(1917~1994)은 한국전쟁 직후 미국 참모대학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무총리와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만주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동기생 김석범과 함께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사에 추천돼 1940년 55기로 졸업했고, 이후 만주군 헌병 상위(대위)에 올라 간도헌병대 대장을 지냈다.
이종찬(1916~1983)은 을사늑약 당시 법부대신이었던 이하영(1858~1929, 자작 작위 받음)의 손자이자 자작 이규원(1890~1945)의 아들로 3대째 친일의 길을 걸은 집안의 인물이다.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1952년 이승만이 벌인 부산정치파동 때 군대동원 요구를 거부해 해임되면서 '참군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의 친일행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졸업한 후, 중일전쟁에도 참여한 이종찬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의 영예인 공(功)5급 욱(旭)6등의 금치훈장(金?勳章)을 받았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것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이종찬이 유일했다.
 
이종찬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뉴기니에서 육군공병 소좌로 있었는데, 종전 후 현지에 한동안 억류됐다가 1946년 6월에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종찬의 묘비에는 드물게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도 "호국의 큰별 이종찬 장군은 (중략) 조(祖)는 정2품 정헌대부 외부대신 법부대신 휘 하영 공이며, 부(父)는 종2품 가선대부 대종원 대종이었던 휘 규원 공이니라, 명문의 혈통으로 지인용을 겸비한 품질(稟質)로서 일찍이 건군의 포부를 지녀(생략)"라고 적혀 있다. 친일파 집안의 역사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정리해놓은 것.
 
이들 일본군 장교 출신을 비롯한 친일파의 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행법이 개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당장 이장이 불가능하다면 거제에서 김백일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운 전례에 따라 이들의 친일행적을 담은 비를 묘 옆에 나란히 세워둬야 어린 학생부터 어른까지 현충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장군묘역 아닌 다른 곳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으니
서울현충원에는 장군묘역 이외에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 둘 더 있다.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일제가 패망할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김홍준(1915~1946)은 2015년에 뒤늦게 서울현충원에 위패로 안치돼 있다. 문제는 김홍준의 서울현충원 위패 안치 시점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활동한 대통령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 발표한 이후라는 점이다.
정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과 현충원 안장이 별개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적이다.
 
국가보훈처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ref>{{저널 인용
|제목=가짜 독립유공자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다
|출판사 =시사IN
|날짜=2019.01.12}}</ref> <ref>{{저널 인용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2229021
|제목=현충원 속 친일파 묘... 이장 어렵다면 '이렇게'
|출판사 =오마이뉴스
|날짜=2019.06.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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