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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포는 왕윤과 정권을 차지하여 분위장군(奮威將軍) 혹은 분무장군(奮武―)<ref>《[[송서]]》39권 지 제29 백관上</ref>에 임명되고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 (칭호)|삼사]]에 준한 대우를 누렸다. [[작위]]도 온후(溫侯)로 진봉됐다.<ref name=":1" /> 여포는 사후처리를 놓고 왕윤에게 동탁의 잔당은 [[사면]]할 것을, 동탁이 쌓아놓은 재물은 공경대신과 장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수차례 권했으나 왕윤은 이를 거부했다. 거기다 왕윤은 여포를 단순한 칼잡이라며 업신여겼으므로 여포는 왕윤과 점차 틈이 생겼다.<ref>{{서적 인용|url=|제목=[[후한서]] 왕윤열전|성=범엽|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여포는 [[홍농군]] 섬현(陝縣)에 있던 동탁의 사위 우보의 토벌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이숙에게 토벌을 지시했지만 실패하고 이숙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했지만, 그 뒤 우보는 괜스레 겁을 먹고 도주하다가 그 부하에게 [[목숨]]을 잃었다. 우보가 죽자 우보의 부하였던 이각·[[곽사]]·[[장제 (후한)|장제]] 등 [[양주 (간쑤 성)|양주]]인들이 사면을 청해왔다. 왕윤이 고집으로 인해 사면이 불허된 이들이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무기]]를 들고 장안으로 [[장안 전투|몰려왔다]]. 이에 [[번조]] 등 이런저런 세력들도 합류하니 그 수가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모 (무기)|모]]를 쥐고 곽사와 [[일기토]]를 벌여 부상을 입히기도 했지만 6월(음력) [[성 (건축)|성]] 내부에 호응자가 있어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다.<ref name="존속 살해">《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ref> 여포는 왕윤에게 같이 도피하자고 했지만 왕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헌제를 내비두고 갈 수 없다며 스스로 잔류를 택했다.<ref name="애국충혼">《후한서》66권 열전 제56 왕윤</ref> 여포는 수백 기만을 거느린 채 동탁의 [[머리]]를 들고 무관(武關)을 거쳐 [[남양군 (중국)|남양]][[태수]]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동탁이 죽은 지 채 40일<ref>《삼국지》여포전의 60일은 만(滿)으로 세지 않은 [[숫자]]이다.</ref> 도 되지 않은 때였다.
 
=== 방랑 ===